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환자 분류해 치료, 이 사고 이후 국민·정부의 응급의료 관심 증가

김세경 전 가톨릭의과대학 교수

무너져내린 삼풍백화점

1995년 6월 29일 오후 4시부터 서울성모병원(당시 강남성모병원) 지하 1층 회의실에서는 응급의료 집담회가 열리고 있었다. 성모병원 소속 병원의 8개 브랜치 응급의학 의료진과 간호사가 매달 모여 응급의학의 발전을 위한 모임이었다. 참석자는 김세경 서울성모병원 응급의학과장과 응급의학과 교수 3명, 전공의 6명, 인턴 2명, 의과대학 실습 학생 4명, 간호사 6명, 간호보조원 3명 등 모두 25명이었다.

서울성모병원 응급센터는 4층 신축건물로 65개 병상을 갖춘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응급센터 중 하나였고, 이곳에서 주로 만났다. 최신식으로 지어진 강남성모병원 응급센터에서 2시간 동안의 집담회를 막 마칠 무렵이었다.

오후 6시경, 응급실에서 회의실로 전화가 왔다.

“큰일 났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전화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급했으며, 응급실로 빨리 올라와 몰려들 것으로 예상되는 환자들의 치료를 마련하자는 호출이었다.

모두가 믿기지 않았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신흥 부의 상징이었던 강남의 명품 삼풍백화점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없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모두가 바로 위층인 응급센터로 곧바로 뛰어 올라갔다. 이어 곧바로 구급차 경광등 소리와 함께 회색 가루를 뒤집어쓴 3명의 시민이 구급대원과 함께 우르르 들어왔다. 믿을 수 없었던 삼풍백화점 붕괴가 현실로 다가왔다.

TV에는 지상 5층, 지하 4층의 삼풍백화점이 폭탄을 맞은 듯 곳곳이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이 계속 전해졌다. 오후 5시 52분경 5층부터 무너지기 시작해 20여 초 만에 2개 동 중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된 것이었다. 당시 건물 안에는 고객 1,000여 명과 직원 500여 명이 있었다.

밀려드는 구급차와 소방차로 이 일대가 꽉 막히고 계속 들어오는 환자들로 응급실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응급센터 앞 일대는 한꺼번에 몰려든 환자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트리아지(TRIAGE)

당시 서울성모병원 응급의학과장이었던 김세경은 응급처치반을 만들고 환자들을 분류(TRIAGE), 치료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병원 내 응급의료팀을 꾸렸다.

선임 응급의학과 전공의 1명을 현장에 급파한 것을 비롯해 의사, 간호사,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20여 명의 현장 진료팀을 사고 현장에 보내 응급 구조 활동을 펼쳤다. 전 의료진이 응급실에 주야로 대기했고, 원내 회의실을 임시 응급 병실로 개조해 밀려드는 응급 환자들의 진료 및 처치에 나섰다.

삼풍백화점에서 다친 응급 환자를 위해 응급센터 내의 환자들을 2층과 4층 회의실을 환자입원실로 전환하고 곧바로 이동시켰다. 응급실 현장 지휘부와 병원 재해대책본부를 만들어 몰려드는 환자들의 중증도를 분류했다.

 

분류

분류색

중증도

긴급환자

적색

생명을 위협하는 쇼크 저산소증 환자로 즉각적인 응급처치가 필요

응급환자

황색

쇼크나 저산소증은 없고, 응급처치로 45~60분 견딜 수 있다.

비응급환자

녹색

손상이 국소적이고, 몇시간 견딜 수 있다. (walking wound)

지연환자

흑색

사망, 생존 가능성이 없는 환자

곧 처치하지 않으면 몇 분 안에 사망할 수 있는 긴급환자는 응급실 내의 다섯 개의 처치구역에서 치료하고, 수 시간 이내에 치료해야 하는 응급 환자는 처치 후 중환자실로 입원하거나, 전공의 동승 하에 다른 병원으로 후송 조치했다.

치료를 몇 시간 이상 연기할 수 있는 비응급 환자는 간단한 처치 후에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고, 현장에서 사망했거나 병원으로 이송 도중 사망한 지연 환자는 즉시 영안실로 옮겼다.

병원 안에 들어오는 환자가 가득 차 응급센터 앞마당에서 환자를 분류했다.

시간별 처치 상황과 환자의 이름, 사망자와 실종자를 찾는 가족을 위해 게시판을 만들어 열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며 그날 밤 11시까지 200명이 넘는 부상자가 계속 몰려왔다. 그 후는 부상자들보다 주로 사망자들이 후송되어 오면서 병원은 통곡의 장소로 바뀌었다.

미국에서 받은 대량재해훈련 도움

김세경이 순식간에 이 같은 환자 분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대학병원에 있으면서 1년에 1~2번 실시했던 대량재해훈련 덕분이었다. 김세경은 미국에서 22년간 의사로 활동해왔던 외과 전문의였다. 1986년 귀국하기 전까지 그는 당시 세계의 최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에 ICBM 원자폭탄이 터지면 어떻게 환자들을 치료하느냐? 에 대비해 훈련한 경험이 있었다.

한국에서 당시 자주 발생했던 대형 재난사고에 대비한 훈련도 도움이 되었다. 1993~1995년까지 대한민국에는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등 각종 대형재난사고가 빈발했다.

이 상황에서 대한응급의학회는 1994년 원주기독병원을 시작으로 해 1995년 아주대병원 등에서 대량재해사고에 대비한 응급의료 조치 훈련을 해왔다. 대량재해 시 한 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리면 치료기능이 마비된다. 그것은 ‘제2의 병원 재해’였다. 이를 예측해 학회는 매년 춘계학술대회에서 환자를 적절히 분류해 치료하는 방법을 연습한 것이다.

김세경은 재해 발생 시 한 병원에 많은 재해 환자가 몰려 병원 자체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2차 병원 재해’를 우려해 신속히 중증도에 따라 4단계로 환자를 분류·분산하기로 했다.

또 응급센터를 4개 구역으로 구분해 한 명의 환자마다 3~4명의 의료진을 배치해 심폐 소생 및 기타 응급처치를 시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강남성모병원에 밀려오는 재해 환자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 적절한 치료가 가능했으며, 중증도에 따른 환자의 분산으로 야전병원의 역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세경은 특별 지원팀을 편성해 환자의 치료에 필요한 인력과 물품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사고 수습에 차질이 없도록 했다. 그는 대량재해가 발생해도 당황하지 않은 응급센터의 노련한 총괄 사령관이었다.

오후 6시 30분경. 응급센터 앞마당에 중증도 분류지역을 결정해 많은 수의 응급 환자를 처치 후 1, 2차 병원으로 후송했다.

긴급 및 응급 환자의 처치는 응급의학과와 소집된 외상팀(일반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을 통해 이루어졌다. 심폐소생술이 진행되는 동안 동공이 확대되거나 심전도의 심장 쇼크 무반응으로 희망이 없는 환자가 있으면, 심폐소생술을 중지하고 긴급환자를 우선 치료했다.

응급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수술방으로 옮겨서 수술했고, 비교적 경증의 환자는 다른 병원으로 후송했다. 중증환자 후송 때에는 응급의학과 의사가 구급차에 같이 타 수혈 등을 도왔다.

비응급 환자들은 드레싱과 적절한 치료를 한 뒤 침대에 실어 응급실 밖에 배치했다. 시멘트 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머리나 얼굴에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며 들어온 환자는 병원 내 복도의 양측과 간호사실 벽에 등을 기대고 우선 앉혀 놓았다,

밤 11시가 지나가면서 응급 센터는 차츰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외상팀 의료진은 열창 치료를 위해 대기 중이던 환자들에 대해 봉합술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응급실 바닥은 피에 물든 세척제로 흥건히 젖었다.

의료진을 비롯한 병원, 학교 교직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학생, 자원봉사자들은 늦은 시간까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응급 구조 활동을 벌였다. 교직원,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군인은 헌혈을 통해 아픔을 나눴다.

병원은 로비에 사고 수습 안내 센터를 24시간 운영하면서 사상자 및 실종자 명단을 신속히 제공해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직도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들은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날을 세워야 했다.

극적으로 생환(生還)한 환자들

1995년 7월 15일은 또 하나의 기적이 나타난 날이다. 토요일 오전, 국민을 감동하게 한 기적이 일어났다. 무너진 삼풍백화점 잔해더미에서 또 한 사람의 생존자 박승현 양(19)이 매몰된 지 17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것이다. 사고 발생 열흘 이후 구조된 생존자는 모두 3명으로 늘어났다. 사고가 난 지 각각 10일 만에 최명석 씨(20), 13일에 유지환 양(18)에 이어 박승현이 마지막에 구조된 생존자였다.

그는 탈수된 상태로 온몸이 바짝 말랐고 얼굴은 가칠한 상태였다. 오랫동안 폐쇄된 공간에 갇혀있었던 환자에게 초기처치는 중요했다. 수액을 주는데 한꺼번에 많이 주면 안 되고 조금씩 줄 수밖에 없었다. 김세경은 의사 생활 50년 동안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 살아 돌아온 이 3명의 환자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생명의 소중함과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공포와 굶주림과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인기승리자였다. 젊은이들의 잇따른 생환으로 한때 중단됐던 생존자 확인·구조 작업이 재개되었다. 그 뒤 새로운 생존자는 없었지만, 생명을 구하는 기쁨을 맛본 구조대원들은 새롭게 힘을 얻었다.

부실설계와 부실공사, 부실한 관리 등의 원인으로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이라는 인명 피해와 2,700억 원의 재산피해를 남겼다.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인적 재해였다. 사고 당일 아침 붕괴 징후가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인재(人災)로 기록됐다.

응급의학 및 응급의료의 위상 강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벌어진 후 의학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첫째, 이 사건을 계기로 헌신적으로 봉사한 의사들에 대한 존경심이 올라갔다. 그중 응급의학을 다룬 의사들의 인기가 치솟았다. 응급의학과를 대한민국에 널리 알릴 계기가 된 것이다. 신생 응급의학과가 활약상이 언론 등을 통해 생생하게 국민에게 전달됐다.

둘째, 전공의 지망생 사이에서 3D(dirty, difficult, dangerous) 업종으로 취급받았던 응급의학과의 위상도 덩달아 올라갔다. 전공의 지원자도 점차 늘어나 응급의학이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셋째, 정부도 응급의료 치료와 응급의학과 발전에 박차를 가한 계기였다. 대량재해 발생으로 대한민국의 응급의료체계 선진화가 시급하다는 것을 일깨운 사건이었다. 성수대교 붕괴 등 연속으로 발생한 대형 사고들과 함께 이 백화점 붕괴 사고는 한국 응급의료체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한국의 응급의료체계는 1979년 의학협회 주관으로 서울 시내 병·의원에 당직의 개념으로 응급 환자 신고 센터를 정하고 주변 병원의 구급차를 차출해 응급 환자의 치료를 개선하고자 한 것이 시작이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 및 장애인 올림픽대회를 개최하면서 체계적인 응급의료 지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응급의료시스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준비도 이루어졌다.

이후 재해 대책 및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고, 전문 인력 및 시설, 장비, 시스템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본격적으로 체계화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1996년부터 종합병원의 응급의료센터는 반드시 전담 전문의를 배치하도록 법으로 정해졌다. 그해 2월에는 첫 응급의학과 전문의 자격시험이 치러져 4월 12일 51명의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배출되었다.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기여

선진국의 응급의료체계 구축은 교통사고에 따른 사망자 숫자와 자동차 산업화, 경제성장의 척도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통사고는 주로 30~40대에서 많이 발생했고, 그 사람들이 죽으면 손실이 컸다. 산업현장의 주축 세대인 셈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1960년도 한 해 교통사고로 13,429명 사망했고, 그 전과 비교해 두 배로 늘어난 수치였다. 이에 따라 1964년 4월 일본은 응급의료체계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미국도 1965년 자동차 사망 5만 명이 넘으면서 응급의료체계를 구축논의가 본격화되었다.

한국은 1988년도 교통사고 사망자가 11,500명에 달하면서 1989년 보건사회부를 중심으로 응급의료구축위원회를 발족했다. 그 당시 현장 처치와 이송과 구급의 중요성. 병원 내 처치 등이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했다.

김세경은 1964년 가톨릭의대를 졸업한 뒤 의료선진국인 미국에 건너가 뉴욕 주립 버팔로 의과대학 외과를 마치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22년간 미국에서 활발한 의료활동을 해온 그는 선진의술을 한국에 전수하기 위해 1986년 귀국한다. 외과 진료는 물론 응급의학이 생소하던 한국에 응급의료체계를 확립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는 경기도 이천이나 제주도에 의과대학을 만들고 싶었다. 외상전문센터를 만들어 자동차 사고에 대비한 외상치료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적자가 클 것으로 예상하면서, 외상센터보다는 그 대안으로 미국의 응급의료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당시 대한민국의 응급실은 조그만 방 하나에 병실 몇 개를 놓고 운영할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다. 이는 응급의료수가가 너무 낮아 어떤 대학병원도 투자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구상을 구체화해 서울성모병원 응급실에 인공호흡기, 엑스레이, 외상 처치실, 중환자 처치실 등을 갖춘 65병상의 응급의료센터를 만들게 된 것이다.

김세경은 응급의료체계 구축을 신속히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1992년 4월 7일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응급의학과, 핵의학과, 산업의학과를 정식 전문과목으로 인정해달라는 공청회가 열렸는데, 참석한 13개 과에서 2개 과만 찬성하고 나머지는 반대했다. 전문과목으로 인정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진입장벽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응급의학과가 정식 과목으로 인정받기까지 노력을 많이 했지만, 보건복지부 장관이 7명, 관련 국장이 4명 바뀌었을 뿐 변화는 없었다. 김세경을 비롯한 대한응급의학학회 임원진은 1989년부터 국방부와 내무부 등 여러 정부 기관들을 방문하고 수많은 집담회를 거쳐 6년만인 1995년 마침내 전문과목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전공의들은 전문의 시험을 못 치르고 대학의학회와 각 대학에서 주는 수료증만 받고 촉탁의로 근무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같은 동료는 승진하는데 촉탁의로 일하면서 힘들 때가 있었다.

응급의학과가 전문과목으로 인정되면서 김세경은 한국에서도 미국식 방식의 응급의학 교육이 필요함을 느꼈다. 학생들을 교육할 때 반드시 심폐소생술을 가르쳤다. 학생 6명이 나오면 정맥주사를 놓는 법을 알려줬다. 시뮬레이션으로 심전도를 읽는 방법도 가르쳤다.

그렇지만, 응급의학의 인기는 여전히 없었다.

의과대학생과 인턴에게 응급의학이라는 과목은 생소했고, 응급의학을 전공한 전문의들도 불안한 상황이었다. 대학에 남은 다른 의과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교수가 되고 있는 과정을 밟고 있는데, 응급의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촉탁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갈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빨리 포기하고 다른 과로 전공을 바꾸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김세경은 불안에 떨고 있는 응급의학과 지망생들에게 비전을 심어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반드시 응급의학이 더 잘나는 시절이 곧 온다.”

이렇게 말하며 희망을 심어줬다.

미국 의사들의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막강한 위상도 알려줬다.

처음에는 전문의가 아니라 응급의학과 인증서를 써줬지만, 결국은 나중에는 다른 전문과목 과보다 더 잘나갈 것으로 김세경은 굳게 믿고 있었다.

결국 응급의학을 전공했던 사람들이 다른 과를 전공한 사람보다 더 빨리 응급의학의 전문가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어의(御醫)를 배출한 4대(代) 의사 가족

김세경은 인체의 신비를 알고 싶었다. 조상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어의(御醫)로 궁궐 내에서, 임금과 왕족의 병을 치료했던 의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의사였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의사가 된 김세경은 아들도 의사로 활동하며 집안 4대가 연속 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다락방에 올라가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세계는 실제로 의지가 지배하고 표상의 세계 너머에는 의지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네가 할 의지가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점점 구체화했다.

이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영향도 받으며 의사로서의 꿈을 하나씩 쌓아나갔다.

카터의 첫 자서전의 제목인 『최선을 다하는 삶(Why not the best)』을 좌우명으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카터가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복무할 때 원자력 잠수함 요원을 선발하는 면접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한 일화의 기록이다. 카터는 훗날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현역 해군 제독으로 근무한 리코버(Rickover) 대령과 면접 때 만난다.

면접관인 리코버 대령은 해군사관학교 시절의 성적을 물어봤다. 카터는 “820명 중 59등을 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다시 돌아오는 질문은 “그렇다면, 최선을 다했는가?”라는 말이었다. 곰곰이 생각한 카터는 “항상 최선을 다하지는 않은 것 같다.”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리코버 대령은 카터의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었던 질문을 던졌다.

“Why not? (왜 그러지 않았나?)”

이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은 당시 면접 대상자인 카터에게 그 후로 인생의 가치관이 되었고,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는 밑거름이 된 좌우명이었다.

김세경은 “세상은 내가 준 만큼 돌려준다. 자기완성의 길을 가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해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응급의학을 선택한 것도, 어쩌면 후회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김세경 전 교수 프로필

1964년 가톨릭의대 부속 성모병원 인턴

1965년 C.S. Wilson Memo. Hosp. (미국) 인턴

1966~1986년 뉴욕주립대 교수, 레익쇼 병원 의무원장

1986년 가톨릭의과대학 부교수

1987~2003년 서울성모병원 응급의학과장

1989년 대한응급의학회 부회장

1993~1997년 대한응급의학회장

 

가톨릭대학교 응급의학교실

미국에서 외과 의사로 활동했던 김세경 교수가 1986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의과학교실 교수로 부임해 1987년부터 강남성모병원 응급실장을 맡게 되며 응급의학교실의 시초가 마련됐다. 1990년 전공의 수련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인 이원재 선생이 첫 전공의가 되었다. 1998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내 응급의학교실이 개설되어 초대 주임교수로 김세경 교수가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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