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이 뚫리면 병원이 뚫린다.” “사명감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경북대병원 이미진 교수가 선별진료소에서 코로나19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이 글은 대규모 감염이 발생했던 대구에서 벌어진 코로나19와 응급의학과 의사의 사투를 적은 것이다. 2020년 2월 17일부터 3월 27일까지 대구 경북대병원 응급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중심으로 이미진 경북대병원 교수의 구술(口述)과 그가 적은 코로나19 일기 등을 참조해 김연욱 마이스터연구소 소장이 정리했다.>

 

2020년 2월 17일 밤, 경북대병원 응급실 당직근무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감염내과 A 교수입니다. 오늘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의심환자가 구미 차병원에서 우리 병원으로 올 것 같습니다.”

“네?”

나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당시에는 정확한 명칭이 정해지지 않아 이렇게 불렀다) 감염은 중국의 문제이지, 우리랑 전혀 상관없을 줄 알았다.

마침내 올 것이 온 것이다.

고려대 안암병원 응급실에서 확진 환자가 발생해 응급실이 폐쇄됐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병원 내에서도 지역사회 감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심해야겠다,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A 교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주말에 구미 차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환자 중에 코로나바이러스 의심환자가 있는데, 우리 병원 중환자실에서 받기로 했습니다. 응급실 접수한 뒤에 알려주시면 내려가 환자를 모시고 가겠습니다.”

응급실은 병원의 통로였다. 응급실을 통하지 않고서는 중환자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전염병이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2015년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메르스 환자를 이곳 응급실에서 받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렴풋하지만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할지 대충 알 것만 같았다.

경북대병원 응급실 의료진

하지만 막상 환자가 도착하자 나를 비롯한 의료진은 우왕좌왕했다. 경북대병원 내에 신종코로나를 대처할 수 있는 매뉴얼도 없었다. 자체검사 시스템이 없어 검체(檢體)를 어떻게 채취하고, 누가 검사하며, 어떤 옷을 입은 채 검사해야 하고, 어느 공간에서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새로운 전염병을 거의 알지 못한 채 의사로서 직관적으로 검체 샘플을 채취해 바로 질병관리본부가 있는 충북 오송으로 보냈다. 새벽 3시경에 도착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검사는 곧바로 진행됐고 다행히 환자가 음성으로 아침에 판명돼 한시름 놓고 있었다.

 

그러나 경증의 확진 환자 1명(31번 환자)이 대구의료원에서 17일 첫 발생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신종코로나 의심환자가 대구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때부터 대구를 공포에 몰아넣은 신천지 교회로 인한 코로나19의 대규모 발병이라는 악몽의 서막일 줄이야….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설상가상, 다음 날인 18일 전날 청도 대남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해있던 환자가 우리 병원 응급실에 있었는데, 양성으로 판정돼 응급실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이로 인해 저녁부터 응급실 의료진의 자가격리가 시작됐다. 당일 근무했던 전문의 3명과 전공의 7명, 인턴 8명 전원이 격리됐다.

이제 근무를 설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문성배 교수 등 전문의 2명과 전공의 4명 밖에 없었다.

“대체 우리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이 일에 무척 당황했고, 적은 인원으로 응급실은 물론 선별진료소까지 맡아 처리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답답했다.

20일 응급실이 폐쇄되면서 첫 근무를 섰다. 응급실 폐쇄는 병원 110년 역사상 처음일 것 같았다. 응급실이 자체 코호트 격리 중이라 남아있는 환자들과 하루를 같이 보내는데 느낌이 짠했다.

경북대병원 제공

이때부터 모든 것이 단절됐다.

식사 배달은커녕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했다. 갑자기 닥친 응급실 폐쇄에 구내식당에는 1회 용기도 부족하고 주문 수량도 파악이 되지 않아 도시락 공급은 중환자실 위주로만 이루어졌다. 우리에게까지 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구내식당에 가는 것도 불편했다. 방역 장비를 칭칭 둘러쓴 채 중무장을 하고 갈 수도 없었고, 장비를 해체한 채 가는 것도 민폐를 끼치는 일처럼 느껴졌다. 다른 과 직원들도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오면 감염 우려 때문에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해 모두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의국에 있는 컵라면으로 하루 세끼를 꾸역꾸역 먹는 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우리의 고통은 먹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응급실 소독 중’

‘응급실 폐쇄’

라는 빨간 경고띠가 쳐져 있는 응급실에 들어갈 때는 가슴이 더 아려왔다.

응급환자가 전국 최고로 많이 몰리는 경북대병원 응급실이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보니 이상한 적도 있었다. 한 번도 겪지 않은,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5중 방호 세트(마스크, 보호복, 장갑, 고글, 머리 캡)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에 뒤집어썼다. 마스크 착용 후 12시간이 지나면 코가 헐고 피부가 벗겨졌다. 그나마 이렇게 중무장하면 코로나19 감염을 막을 수 있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가용할 수 있는 고글, 마스크 등이 부족해 의료진은 공포에 떨었다. 확진 환자가 지나갈 때마다 마스크, 가운, 글로브, 고글 계속 바꿔줘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특히 고글이 부족해 고글에다 이름을 써 자기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재사용하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1주일간 컵라면으로 식사를 때운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떡볶이와 닭강정을 응급실로 보냈고, 이마저도 받지 않겠다고 하면 응급실 앞에 단팥빵과 한약을 몰래 놓고 가기도 했다. 시민들이 보낸 떡볶이와 반월당에서 보낸 닭강정을 먹으면서 우리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일주일 만에 먹어보는 사식이었다.

경북대병원 제공

그 사이 대구에서 확진 환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우리는 추가로 선별진료소 설치와 방역망 구축에 나섰다. 중증 응급환자들은 응급실로 들어오지 못한 채 아예 주차장에서 심폐소생술을 받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응급환자들이 앰뷸런스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모두 구급차 안에서 응급처치를 받아야 했고, 처치가 늦어질 때는 구급차가 7대까지 줄을 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하다 확진 환자로 판명이 나면, 전체가 또다시 코호트 되어야 하기 때문에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전쟁보다 더한 참혹한 풍경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되어야 하나? 나는 암울했다.

2주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5종 방호 장비를 착용한 채 연구실이나 당직실에서 대기하면서 잠깐 선잠을 자기도 했다. 방호복은 화장실 갈 때만 벗었다.

 

나는 2015년 메르스를 겪었다. 그에 앞서 19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서울성모병원에서 인턴을 하면서 많은 환자를 받았지만, 지금처럼 공포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당시 3일 정도만 크게 힘들었고, 1주일 정도 지나니까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감염의 우려가 없었고 대부분 외상환자이기 때문에 맨손으로 환자를 만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무증상 감염자가 많아 환자를 진료하다 언제, 어디서 감염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무서웠다. 응급실에 오는 모든 환자는 그냥 코로나19 환자라고 생각해 진료하는 것이 차라리 속이 편했다.

 

응급실이 뚫리면 병원이 뚫린다. 우리가 놓치면 병원 전체가 코호트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사명감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응급실이 감염병으로부터 뚫리지 않게 사수하자!’

그것이 우리의 과제였지만, 한편으로는 스트레스로 다가와 다들 촉각을 곤두세웠다.

응급실 바로 앞 선별진료소는 하루 60~100명의 신종코로나 검사를 처리하며, 멀지 않아 종식되겠지, 하는 기약 없는 희망만이 우리를 겨우 안심시켰다.

코로나19 환자 및 의료진을 위한 응원의 글. 경북대병원 제공.

우리는 사석에서 이야기한다.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100년 이내 대구에서 또 겪을까?

결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응급실 구조도 많이 바뀔 것이다. 이 기회에 응급실도 오염조와 일반 클린조 개념으로 나누어서 좌우로 나누든 공간 활용이 있으면 좋겠다.

향후 다른 지역에서 감염병이 확산되었을 때 “당신은 자원봉사 갈거야?”라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가야죠.”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겪었던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끔찍했던 이 일을 경험으로 말하며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미진 교수의 코로나19 일기>

기억해내야 하는 것들을 조금은 써보자 그것이 기록의 힘이 아닐는지….

 

2월 17일

오늘 하루 동안 투석 받던 환자 3명이 심정지로 왔다. 신장내과에 한번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구미 차병원에서 코로나 의심환자 한 명을 보내왔는데 응급실로 진입이 되어서 난리가 났다. 코로나가 다른 나라 국경 저 너머의 일인 줄 알았는데 바로 코앞에 놓이니 당황스러웠다. 대신 경증의 확진 환자 1명(31번 환자)이 대구의료원에 입원했다.

※ 대구에 첫 확진 환자가 발생했다.

 

18일

청도 대남병원에서 전원 온 환자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아 당일 근무했던 전문의 3명과 전공의 7명이 인턴 전원과 함께 격리되었다.

 

19일

병상부족으로 보호자대기실 앞에 있다가 C구역으로 들어간 환자도 확진이 되면서 2차 의료진 격리가 되어 전공의 4명에 전문의는 나와 문성배 선생님을 빼고는 모두 격리대상자가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20일

의료진 격리 시작 및 응급실 폐쇄 이후 첫 근무. 아마 응급실 폐쇄는 병원 110년 역사상 처음이지 않을까. 응급실 자체 코호트 격리 중이라 남아있는 환자들과 하루를 같이 보내는데 느낌이 짠했다

※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

 

21일

응급실 소독 중. 응급실 폐쇄라는 빨간 경고 띠들이 쳐져있는 응급실을 들어갈 때 느낌이 뭉클하고 슬펐다. 이제 시작인데. 텅 빈 응급실을 보니 꽤 넓은 공간이었구나.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다.

 

22일

응급실 폐쇄 후 첫 근무. 우리와 파티마를 제외한 주변 모든 응급실이 폐쇄되었다. 영남대와 계명대는 의심환자, 대구가톨릭은 직원 확진 환자로 우리만 하다 보니 환자가 문을 열자마자 밀어 들어오고 있다. 전원 문의 안 된 환자들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을 처음으로 적용했다. 보훈병원과 요양병원 환자들이 이전에 하듯 그냥 와서 돌려보냈다. 외상환자도 청도대남 외래 경유 환자를 그냥 받아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23일

주변 응급실 폐쇄 여파는 지속되고 있다. 5종 방호복에 특히 마스크 착용 후 12시간이 지나면 코가 헐고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한다.

 

24일

언론에서 대구를 주목하더니 확진 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 컵라면만 일주일째 먹고 있다고 했더니 여기저기서 시민들이 떡볶이와 닭강정을 보내주셨다. 가슴이 찡하고 고마웠다. 밤에는 시민들이 한약과 빵도 응급실 문 앞에 놓고 가셨다.

※ 컵라면 7일째, 처음 덮밥 먹음. 확진자 수 전체 763명 중 대구 483명으로 대량 발생

 

25일

취재 및 응원차 원장님이 응급실을 방문해주셨다. 필요한 개인 보호구가 무언지 물어보셔서 우선 고글이 많이 부족하다고 말씀드렸다. 아침부터 고글이 모자라 근무자 1인에 한 개씩 제공이 되지 않아 우선 수술방에서 사용하는 faceshield가 내려왔지만, 방호가 잘되지 않는다. 원장님께 심각하게 말씀드렸더니 대구시의사회 통해서 우선 50개를 구해다 주셨다. 구해 주신 사진을 톡에 올렸는데 이게 생각보다 파장이 커서 다음 등의 포탈 메인 사진에 걸렸다.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

 

26일

밤에 잘 때 계속 코피가 나고 콧등이 쓰라린다. 입술 안쪽으로는 궤양까지 생겨서 뜨거운 것 먹기가 무척 힘들다. 이래도 내일부터 자가격리 해제되는 의료진들이 복귀하니 버틸만하다.

 

27일

원장님이 챙겨주신 고글을 받으러 신규 인턴 선생님들과 잠시 원장실을 들렀다. 대구시 의사회에서 구하기도 힘드셨을 텐데… 가족들의 걱정이 최고조인듯하다. 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고 안심시켜드렸다.

 

28일

오랜만의 낮 휴식, 그리고 외부 공기. 오랜만에 외부 사람들과 학회 일 협회 일에 대해 논의했다. 2주 만에 처음 이야기하는 듯하다. 내가 해야하는 사회 속의 일들이 아직은 있어 같이 병행해야 한다.

 

29일

오랜만에 아버지 얼굴 보니 힘이 났다. 그간 얼마나 맘고생, 몸고생이 많으셨을까. 사랑하고 존경스러운 우리 아버지 그리고 가족들. 하지만, 대구에 연고가 있는 나는 가족들에게는 현재는 짐인 듯하여 괜히 서글펐다. 서울에 있는 병원들이 대구지역 거주자는 주민등록 등을 확인하여 진입을 막고 있었다. 다행히 난 주민등록은 서울이라… 그래도 슬프다.

 

3월 1일

응급실로의 복귀, 다시 코로나 속으로. 규석이 정훈 선생님, 태용 선생님 등 친구들이 걱정 반 격려 반 응원 전화가 잔뜩 걸려왔다. 오랜만에 웃어본 것 같다. 화곡동 집에서 보내준 찹쌀떡 먹기 시작했다.

 

2일

요일이나 날짜 감각이 무뎌졌다. 이젠 온라인 화상회의이나 전화 회의는 낯설지 않다. 확진자 수가 4천 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나이트 근무 인수인계 때 응급실 주차장에 119구급차량 7대를 인수인계해서 깜짝 놀았다. 응급실 밖 앰뷸런스에서 이제는 진료를 하고 있다. 밤새 119구급대 문의 전화 20개를 받았다. 새벽에는 조금 화가 났다. 받을 수 있는 병상이 이젠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차라리 응급실 폐쇄된 동산이나 파티마가 부럽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든다.

 

3일

내가 어제 진료했던 환자가 아침에 코로나 양성 판정 나오면 기분이 묘하다. 이젠 병원도 안전하지 못하구나. 바로 옆에 있었던 환자인데. 더욱이 발열도 없었다. 청진에서 이상 소견만 있을 뿐. 일상으로 돌아갈 날이 언젠가는 있겠지. 일상이 그리운 오프날이다. 밖을 나가지 않은 지 어언 15일이 다 되어간다. 병동에서 드디어 확진 환자가 나와서 응급실로 내려서 읍압병상 EN1이 들어가는 일이 생겼다. Septic arthritis로 OS입원환자.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는 것일까?

 

4일

확진 환자 수가 5천 명이 넘어서고 있다. 식약처장이 마스크 말려서 다시 재사용하라는 걸 기자회견장에서 들어야 하다니 웃고픈 코메디이다. 오늘 기자분 3명이 응급센터 스케치하러 오셨다. 확진 환자 혹은 의심환자들이 응급실에 벌써 5명이나 있다. 격리실은 확진 환자로 이미 다 차여져 있고 발열 구역도 이제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격리실에 어제 온 20대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기자들이 취재하는 도중에 119구급대에서 병원 밖 심정지 환자를 데리고 왔다. 당뇨가 있기는 했어도 54세이다. 응급실 주차장에서 CPR 후 사망 선언했다. 전쟁터가 이런 느낌일까. 아까 같이 오신 기자분이 24년 전 러시아 취재 때보다 더 혹독하다는 표현을 하셨다.

 

5일

50년간 절대 입에도 대지 않았던 홍삼 엑기스를 먹기 시작했다. 힘들기는 한가보다. 1주일 내내 마감되었던 이마트 배송이 드디어 10일에 배송이 가능해서 샤워 비누와 생필품, 야채 등 먹거리를 구매했다. 이걸로 또 얼마를 버티어야 할지 모르겠다.

 

6일

바이러스의 스텔스 기능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때린다. 질병에 걸린 것을 모르고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내가 본 환자들에게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 속의 나라는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분당제생병원에서도 의료진 포함 9명이 집단별병해서 병원이 폐쇄됐다. 이제 시작인 걸까? 마스크 5부제도 웃고픈 일이다

 

7일

 

8일

 

9일

어제 근무 때부터 확실히 코로나 확진 환자가 줄기는 했다. 이제는 슬슬 일상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 것일까. 하지만, 다른 지역에선 확산이 시작되는 것 같아서 오히려 서울 사는 가족들이 더 걱정이다. 준범이가 또 안부 전화를 걸어와 통화해서 기분이 다시 업되었다.

 

10일

 

11일

오히려 이제는 서울 경기지역에서 집단발병 및 병원감염이 문제가 되고 있다.

 

12일

WHO 팬데믹 선언하다. 이젠 다 위험에 빠져있다. 몸이 많이 아프다. 편도선염이 또 재발되어 힘들다. 저녁 근무 때 항생제 처방을 추가로 받아야겠다.

 

13일

안녕하세요. 코로나19의 중심에서 하루에 3-4회씩 CPR을 하고 있는 이미진입니다. 지난주부터 부쩍 CPR 건수가 많아졌는데 생존입원율은 거의 zero percent에 가깝습니다. 대구·경북지역은 mechanical device를 이용한 (LUCAS) CPR을 이번 기회에 모든 CPR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경북대병원도 3월 3일에 긴급 입고되었습니다. 어제 구미 차병원에서 LUCAS 구매를 함에 따라 권역 및 기관급에서 70% 이상이 구매를 완료하였습니다. 확진자인 경우는 BVM을, 미상인 경우에는 I-gel 을 일차적으로 권고하고 있고, ROSC 회복 후에 ETI을 하고 있습니다.장소는 경북대병원인 경우 기존 소생술실이 센터 안쪽에 진입해서 있어, 주차장에 이동형 병원을 대여하여 이동 소생술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동형 소생실도 지난주부터 적용했고, 그전에는 주차장이나 앰뷸런스에서 했습니다.

 

보내주신 권고안을 보고 학회 차원에서 조금 더 힘을 실어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서 조금 적었습니다.

 

1. 학회 가이드 라인에서 지금 권고안보다 유행지역에서는 mechanical device를 적용하는 것을 조금 강하게 권고했으면 합니다.

(사용할 수 있으면... 이라는 문구보다) 이번 경북지역 응급의료센터에 LUCAS 구매를 신청할 때 학회나 이론 근거를 병원 측에 제시할 때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2. 보호구인 경우 확진자 혹은 발열, 호흡기증상자는 level D를, 나머지는 5종(에이프런, 고글이나 페이스쉴드, 장갑, N95, 머리캡)을 장착하는데, 현재 발열이 없는 코로나 확진 환자가 많아서 실제 유행지역에서 CPR에 참여하는 경우 대부분 level D를 착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권고하신 필터는 사용 가능한 모델이 있는지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3. CPR 이후 disposition이 이번 권고안에서 빠져있는데, 오히려 CPR 이후 ROSC된 환자를 ICU 가기 전 처치나 소생술실 동선, 검사제한도 있고

특히, 사망 선언 후 post mortem COVID-19 test 시행과 chest PA 확인, 영안실에 언제 어떻게 내리는가가 오히려 응급실 일선에서는 혼란이 많습니다.

권고안에 전문가 의견 형식으로 정리를 해주셨으면 어떨까 의견 드립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살기는 하는가 봅니다.

Level D를 입고 주차장에서 CPR도 해보고, 응급실 환자는 5종 보호구 착용하고 진료하고요.

응급실 격리구역의 확진 환자들과 같이 생활한 지 어언 3주가 넘어가는데 병상 옆 구석 자리에 인플루엔자 B 확진 환자들이 의료진의 맘도 모르고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응급의학회 감염 CPR 관련해서 조금 의견 드려보았습니다.

그럼,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 날을 그리워하면서...

 

14일

편도선 감염 진행이 심해져서 약 복용량과 복용 일을 늘려가기로 했다. 몸 상태가 많이 악화되기는 했다.

 

15일

야간당직 중, 확실히 확진 환자 수는 줄었다. 체감적으로도 숫자로도.

 

16일

유럽 미국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여 조카 하윤이도 3월 30일에 귀국하기로 했다. 유럽 중 이탈리아 스페인이 초토화되고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국가와 도시들인데. 독일 큐오백 회사에서 백신 개발 소식이 들려온다. 극복의 신호탄이 되어줄지.

 

17일

일상으로 돌아가는 신호탄일까, 월급날이기도 하고 4년 차 졸국 기념 촬영도 했다.

 

18일

응급실 폐쇄 이후 딱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도 한사랑요양병원 집단감염, 75명 확진, 분당제생병원 31명 확진(원장 포함)과 같이 집단발병이 지속되고 있다. 저녁 근무 나와보니 경산에서 OOO 내과 선생님(60세)이 확진 환자에게 감염되어 격리실에 와있었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19일

노유영 선생님이 연구 논문 때문에 잠시 연구실을 방문했다. 밖의 날씨가 완연한 봄은 맞은듯, 하지만 오후 늦게 돌풍과 강풍이 불었다. 선별진료소 텐트도 잠시 철수, 영남대병원 17세 사망자 검사결과로 시끄럽다.

 

20일

일상으로의 신호탄인가, 신율이 부친상 조문 예정, 요즘 신규 확진자는 해외유입이 더 많은 듯. LA카지노 100년 역사에서 첫 폐쇄라고 함. 뭐 손흥민 선수도 2주 자가격리 중인데…

 

21일

 

22일

 

23일

월요일 evening

 

24일

night 가족들을 챙겨야 할 때

 

25일

가족들을 위한 피부연고 마스크 택배로 보낸 날 하윤이도 앞당겨 들어오고

 

26일

이젠 체력이 바닥인 듯. 그래도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오늘 정말 오랜만에 유니클로에서 근무복 바지용 EXY팬츠 xs사이즈로 12,900원씩 3벌 구매했다. 맞을런지...

 

27일

삼덕세탁소에 겨울 코트 세탁을 맡기느라 처음으로 외출을 했다. 마스크 쓰고 바라본 세상 밖은 신기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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