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의료체계 구축 및 응급의료기금 마련에 앞장서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개설대전·충청지역 응급의료 개척

응급의학회 체계 구축 다지고, 응급의학 30년사 집필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개설

 

199691일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과장으로 첫 발령을 받은 유인술 교수는 그동안의 고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남들은 3~4년 만에 하는 전문의 과정을 무려 6년 만에 마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급(留級) 처분을 받아 과정이 늦어진 건 아니다. 전문의 취득이 늦어진 건 응급의학과가 신생 과라 정식으로 수련의 과정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그 뒤 1995년 응급의학과도 전문과목으로 인정받았고, 유인술은 19963월 제1기 응급의학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다.

유인술이 전공의 과정을 밟을 때 우리나라에는 응급의학과가 연세대 의과대학 소속(신촌, 영동, 원주)과 서울성모병원, 원광대병원 이렇게 3개 대학에 불과했다. 초기에 트레이닝 받은 사람들은 과정이 끝나도 전문의를 딸 수 없었다. 응급의학과가 정식 전문과목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6년 첫 전문의 시험이 치러지면서 각 대학병원에서는 응급의학과 개설을 서둘렀고, 충남대병원도 응급의학과 개설의 필요성을 느끼게 돼 그해 6월에 교수 모집공고를 냈다. 유인술은 고향인 대전의 충남대병원에서 교수를 모집하자 곧바로 지원해 그토록 바라던 교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유인술에게는 부담스러운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전문의를 취득한 동기 중 유일하게 대학병원 응급의학과를 새로 개척하는 업무를 맡아 혼자서 감당해야 할 부담이 컸다. 다른 동기들은 이미 개척된 대학병원 응급의학과에서 교수로 가는 사례가 많았다.

국립대에서 응급의학과를 개설해 후학들을 양성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대한민국의 응급의료가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이 같은 업무는 레지던트로 근무했을 때와 비교하면 하나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롭게 응급의학을 개척하는 과정이 마냥 즐거울 것 같았다.

응급의학과를 개설한 유인술은 충남대병원 응급실의 상황을 먼저 파악했다. 확인결과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대전에서 제일 큰 병원인데, 1년에 응급실에 오는 환자가 5,800명에 불과한 것이다. 보통 병원 규모로 봤을 때 1만 명이 넘어야 정상이었다.

유인술은 그 원인을 조사해보니 어이가 없었다. 인턴들이 응급실에 오는 환자를 잘 설득해서 다른 병원으로 대부분 전원(轉院·병원을 옮기는 것)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에 응급실에 전문의는 없고 인턴들만 있다 보니 발생한 현상이었다. 인턴들은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할 줄도 몰랐고 환자가 오는 걸 귀찮게 여긴 것이다. 전원을 많이 해야만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 전원이 횡횡하고 있었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유인술의 몫이었다. 인턴들에게 환자를 맡기지 않고 직접 보면서 정성을 다했다. 혼자 충남대병원 응급실을 책임지다 보니 1365일 쉴 날이 없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해 보통 자정에 퇴근했다. 집에 있을 때 병원에서 연락 오면 한밤중에도 나가는 일도 허다했다.

유인술의 이 같은 노력으로 인턴들이 다른 병원으로 환자를 보내는 것을 바로잡았다. 간호사들에게는 매주 수요일 응급환자에 관한 교육을 했다. 응급환자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일이 알려줬다. 혼자서 응급실 틀을 하나하나 잡아나갔다. 이렇게 1년을 열심히 일하다 보니 그제야 응급실을 찾는 환자 수가 연 14,000여 명으로 1년 전과 비교해 두 배 이상이 늘어났다.

체계적인 응급실 진료의 틀을 잡아나간 유인술은 후학양성에도 주력한다. 응급의학과를 개설한 이후 16개월이 지난 19983월 드디어 전공의를 모집한다.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가 환자 치료는 물론 전문의 양성 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대전·충청 지역에는 2000년까지 단국대병원과 충남대병원에만 응급의학과가 있었다. 이후 충남대병원에서 수련한 전문의들이 황무지였던 대전·충청지역 병원 응급의학과를 개척한다. 대전을지대학병원을 비롯해 건양대병원과 대전성모병원, 충북대병원, 대전선병원 응급의학과를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출신들이 잇따라 개설 또는 전담했다. 충남대병원이 인근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개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력양성 사관학교인 셈이다.

 

권역응급의료센터협의체 통해 응급의료 표준화 틀 마련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가 개설됐지만, 주위에서는 아직도 응급의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응급실에 근무하는 간호사조차도 응급의학의 개념을 몰랐다. 타과 교수들도 응급의학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교수들은 과거에 트레이닝 받을 당시 응급실만 생각해, 기존 방식대로 응급시스템을 돌리려 했다. 응급실에 환자가 오면 응급의학과에서 처치나 처방하는 것도 싫어하며 견제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유인술이 충남대병원에서 막내 교수이다 보니 그런 경향이 더 심했다. 더욱이 그는 충남대 의과대학이 아닌 다른 의과대학에서 수련한, 타 대학 출신이라 더했다. 응급의학의 역사가 없는 것도 무시를 당하는 하나의 요인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을 참고 견디면서 그는 응급의학을 지키고 다져나갔다.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유인술은 다른 학회는 어떤 과정을 거쳤나 궁금했다. 알아본 결과 다른 학회도 내과, 외과에서 대부분 갈라져 나온 학회였다. 갈라져 나온 역사를 보니 30년이 지나야 어느 정도 자리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 하나의 과가 생겨 대학병원에서 인정받고 자리를 잡으려면 그 과가 생긴 뒤 인턴, 레지던트 트레이닝 받은 사람이 주니어 스텝이 되어야 하는 기간이 보통 30년 걸렸다. 유인술은 30년이 지나면 응급의학과도 자리를 잘 구축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초기 트레이닝 받은 사람끼리 후배나 제자들에게 좋은 것만 물려주고 나쁜 것은 물려주지 말자고 다짐한다. 유인술은 레지던트 4년차 때인 199410월 응급의학 수련의를 중심으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근처에서 트레이닝 동기인 세브란스 최옥경 선생(현재 영종도 개업)의 제안으로 물둘레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물둘레회는 호수에 돌을 던지면 원이 잔잔히 펴져 나가는 것처럼 그들의 작은 움직임이 의료계에 영향을 미치자는 차원에서 결성됐다. 트레이닝 받은 사람 10명이 단합해 응급의학을 열심히 배우고 똘똘 뭉쳐 그동안 받았던 서러움, 억울함을 후배들에게는 물려주지 말자는 취지였다. 그 모임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응급의학의 발전을 위한 모임이었다.

그러던 중 19985월 유인술은 이근 길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유 교수! 권역응급의료센터끼리 협의체를 만들어 복지부에 일관된 목소리를 내는 게 어때?”

네 좋습니다. 교수님.”

권역응급의료센터가 들어설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실무자들이 모여 복지부에 일관된 목소리를 내자는 취지였다. 응급의학과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유인술에게도 나쁠 리 없었다.

이후 이근, 유인술, 황성오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교수, 민용일 전남대병원 교수, 이재백 전북대병원 교수 등 5명이 대전 유성에서 만나 권역응급의료센터협의체를 결성한다. 협의체 대표는 이근, 간사는 막내였던 유인술이 맡았다.

정부는 응급의학을 잘 몰라 응급의학 전문의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복지부와 협의체는 협조 관계가 잘 이루어졌다. 정부는 권역응급의료센터의 법적 기준을 협의체와 조율하기 시작했다. 복지부와 하나씩 정책을 만들면서 유인술은 정책이 응급의료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응급실에서 환자를 아무리 많이 봐도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급의학 관련 법과 제도가 모든 응급환자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유인술은 권역응급의료센터의 표준화 작업을 위해 밤새 자료를 만들어 아침에 협의체 회원들에게 팩스를 보내 의견을 구했다. 그런 과정을 몇 년에 걸쳐서 해왔다. 그러나 힘들지 않았다. 유인술이 젊었을 때였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등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1997년과 1998년에 권역 별로(광역시 및 도) 권역응급의료센터를 만들 계획이었다. 유인술은 협의체 간사를 맡고 일을 추진하는 한편, 충남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건립사업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충남대병원은 1998년 권역응급의료센터로 지정된 뒤 3년간의 공사를 거쳐 20015월 중부권 최초로 독립된 시설을 갖춘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정식 개원한다.

권역응급의료센터를 만드는 일과 지역 응급의료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유인술은 협의체를 통한 일을 하면서 응급의료체계의 정비, 응급의료 인력의 양성, 일반인의 교육 등 응급의료의 중심역할을 할 수 있었다. 유인술은 중앙소방학교 응급구조 양성반 교육과 119 구급대 질적 관리 향상을 위한 노력을 병행하는 등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갖추는 일을 동시에 해나갔다.

유인술이 응급의료 관련 일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던 건 대한응급의학회 초기만 해도 학회의 인력 풀(pool)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학회에는 정책을 개발하고 추진할 만한 역량이 갖춰지지 않았고, 전문의도 몇 명 없었다. 국회나 정부를 상대로 일할 사람이 없어 유인술은 작은 힘이지만 학회 일에 힘을 보태기로 결심한다. 그는 협의체 모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학회가 체계를 갖춰지자 정책이사를 맡아 정책 관련 일을 중점적으로 추진한다. 국가 전체적인 응급의료의 표준화된 틀을 만들기 위해 대정부, 대국회, 대시민 단체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유인술은 대한민국 응급의료시스템을 미국과 비슷한 모델로 만들려고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작업이 인력 확보였다. 미국처럼 우리도 1주일에 3~4일만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모델을 만들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응급의학 전문의 인력을 늘려야만 한다. 인력을 늘리는 방법은 응급의료기관 평가에 의무적으로 인력 기준을 넣는 것이었다.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으면 응급의학 전문의들의 취직자리를 보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응급의료를 20~30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인력 보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인력을 늘리려면 법적 기준을 만들고 인건비를 줄 수 있는 기금을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전문의 증가에 맞춰 응급실 법적 기준과 평가 기준, 응급의료기금 마련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응급의료체계 구축과 응급의료기금 마련

 

- 응급의료체계 구축

 

유인술은 권역응급의료센터협의체 간사와 학회 정책이사를 동시에 맡다 보니 정책 추진에 힘을 받을 수 있었다. 학회 의견과 협의체 의견은 대부분 비슷했다. 정책에서 가장 시급했던 건 응급의료체계 구축이었다. 지역마다 응급실은 있지만, 지역 응급의료체계는 없었다. 복지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도 응급의료가 뭔지 몰랐다. 그런 사람에 대한 교육과 설득이 우선이었다.

정책을 만들 때 법적 기준이 없으면 안 되며, 법으로 제도화해야 각 병원에 요구할 수 있다. 응급의료기관의 시설이나 인력, 장비 기준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응급의학 발전의 기초라고 생각하고 이 기준을 강화하면 자연히 병원은 응급의학 전문의를 많이 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응급실 기반이 구성되고 환자도 제대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유인술은 생각했다.

2002년 정부가 중앙응급의료센터를 만들면서 유인술은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 기획팀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윤한덕은 복지부와 학회, 국회에 다리 역할을 많이 해 유인술이 일하는 데 한결 수월할 수 있었다. 병원에 시설과 장비, 인력 등의 기준이 올라가면 당연히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이를 보상할 수 있는 수가 해결도 시급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유인술은 윤한덕과 수가 해결에 나선다.

유인술은 또 윤한덕과 함께 응급의료체계 구축을 위한 응급의료정보망을 만들고 응급의료기관 평가도 함께 했다. 평가 결과에 따라 지원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병원이 움직인다는 것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평가 없이는 병원장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병원 평가를 발표하고 난 뒤 압박과 지원을 동시에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유인술은 권역응급의료센터협의체 간사를 1998년부터 2011년까지 13년간 수행했고, 2002년부터 7년간 대한응급의학회 정책이사, 2009년부터 2년간 기획이사, 2011년부터 2년간 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정부의 응급의료 정책개발에 앞장서왔다.

 

- 응급의료기금 마련 및 확대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 199511일부터 시행되면서 응급의료기금은 의료기관에 의한 과징금을 기초로 했다. 기금은 30~40억 원에 불과해 운영비로만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2002년 교통범칙금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을 일반회계에서 응급의료기금으로 출연하도록 해 응급의료기금이 400억 원으로 늘었다. 2010년에는 응급의료기금을 2,000억 원으로 늘리는 등 기금이 점점 많아졌다. 이와 발맞춰 정부는 매년 응급의료기관의 운영 상황을 평가하고 응급의료 지원금을 차등 지급하면서 응급의료기관의 질 향상을 기대했다.

응급의료기금 마련과 확대에는 복지부, 시민단체 등의 노력이 보탬이 되었지만, 유인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학회가 신생 학회라 재정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유인술은 응급의료기금 마련을 위해 개인 비용을 들여가면서까지 국회와 정부 등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설득에 나섰다.

당시 보건복지부 최희주 과장은 유인술의 열정에 감탄하면서 말한다.

교수님! 국회 열심히 쫓아다니세요. 국회라는 데가 열심히 쫓아다니는 사람에게는 구둣값을 줍니다.”

? 무슨 구둣값이요?”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국회는 무시하지 않습니다. 국민을 위한 방안이라면 언젠가는 해줍니다.”

최희주의 말처럼 유인술은 신발이 다 닳아질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 KTX가 생기기 전에는 직접 차를 몰고 서울로 부지런히 올라갔다. 서울에서 일을 보고 난 뒤 술을 한잔 걸칠 때면 서울에서 대전까지 대리운전으로 내려올 정도로 열의가 있었다.

KTX가 개통됐던 200441일 이후 유인술은 더 이상 교통정체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차량을 몰고 가지 않고 KTX를 타고 서울을 올라가면 1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통체증 해소는 물론 열차 안에서 전략과 전술을 짤 수도 있었다. 유인술의 양복 주머니에는 항상 손자병법 문고판이 있었으며, 손자병법을 활용한 전략과 전술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관계자들을 설득할 자료도 일일이 만들어 응급의료기금 마련의 필요성을 알렸다. 유인술은 응급의료기금이 단지 학회 회원을 위해 조성된 것이 아니고 시민을 위해 제대로 된 응급의료체계를 만드는 일에 쓰인다는 걸 알려 나갔다. 그러나 말로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기금에 대한 설득 논리와 데이터가 필요했다. 기금이 필요한 논리를 개발하고 데이터 등을 바탕으로 책자를 만들어 이론적 뒷받침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응급의료기금 보존에 빨간불이 켜질 때도 있었다. 2004년 기획예산처가 기금을 없애려 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예산처는 정부 기금 중 응급의료기금의 평가를 59개 중 일부러 꼴찌로 점수를 매겼다. 응급의료기금을 폐지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대로 수용한다면 응급의료기금은 없어질 것이고 앞으로 응급의료 발전에 있어서 커다란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인술은 국회를 다시 쫓아다니며 기금 연장의 필요성을 알렸고,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응급의료기금이 유지됐다. 나중에는 기금이 오히려 2,000억 원으로 늘어나기까지 했다.

응급의료기금 유지 및 확대를 위해 유인술은 2011년 한 해 대전에서 서울까지 114번을 왕복할 정도로 지독한 근성을 발휘했다. 3일에 하루꼴로 서울을 왕복하며 공을 들였다. 평일에는 일과 중 병원 일을 하고 저녁에 서울로 퇴근한 후 막차를 타고 다시 대전 집으로 퇴근했다.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출근했으며, 야간당직을 선 다음 날 아침에는 서울로 퇴근했다. 서울에서 국회와 보건복지부, 시민단체 등을 찾아다니며 응급의료기금의 확대와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필요한 제도적 정립을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유인술의 노력으로 응급의료기금이 늘어나고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선한사마리아인법 통과에 기여

 

구호자가 응급처치를 하다 본의 아닌 과실로 인해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거나 손해를 입혀도 민·형사상 책임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는 내용이 법으로 반영되는 선한사마리아인 법2008613일 국회를 통과했다. 시민들이 갑자기 길거리에서 쓰러졌을 때 보호할 조항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전에는 사람이 쓰러져도 의료인이 아니면 조치할 수가 없어 소중한 생명이 길바닥에 버려지곤 했다. 결과가 잘못되면 구호자가 소송에 휘말리거나 죄를 뒤집어쓰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이 법의 통과로 쓰러진 사람에게 하는 선의의 조치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게 되었다.

이 법의 통과는 유인술과 선한사마리안운동본부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40대 남자가 주위의 도움을 받지 못해 쓰러진 뒤 사망에 이르게 된 사건이 발단이었다. 김정규 전 동남은행장의 동생인 고() 김왕규(당시 49) 씨가 2002319일 아리랑치기를 당한 뒤 병원 응급실에서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8시간 만에 숨졌다. 이 같은 과실에도 병원은 잘못을 시인하지 않아 김정규는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지만 1차 판결에서 패소했다.

이를 억울하게 생각한 시민단체인 건강세상네트워크의 조경애 대표의 소개로 김정규는 유인술을 만난다. 유인술은 판결문을 보자 김정규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자세히 다퉈보면 2심 재판에서는 승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르신!. 이 재판은 이길 수 있는 재판입니다. 분명 병원의 과실이 큽니다. 제가 의견서를 작성해 드릴 테니까 다시 재판해보세요.”

20066, 2심 판결은 김정규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병원이 검사와 처리를 소홀히 해 사망에 이른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김정규는 2심 재판에서 승소해 9,800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받았다.

김정규는 동생이 억울하게 죽었지만, 앞으로 이와 유사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응급환자 살리는 운동을 시작한다. 배상금으로 받은 9,800만 원은 제수(弟嫂)에게 주고, 본인 돈으로 응급환자를 살리기 위한 선한사마리아인운동본부를 만든다. 동생의 죽음을 시민사회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후 이 단체를 중심으로 선한사마리아인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2008년 법이 통과됐다. 유인술은 선한사마리아인법 통과에 기여한 공로로 선한사마리안본부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유인술은 또 윤한덕과 함께 응급의료에 종사하는 사람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응급의료인 전진대회를 만들어 200511월 첫 대회를 개최했다. 응급의료기금에서 예산을 지원하고 응급의료에 종사했던 사람에게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장도 주고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대회였다.

 

이사장 때 학회 체계 구축 다져

 

유인술은 2011년 학회 이사장으로 선출되면서 학회 발전을 위한 기초작업에 나선다. 우선 SCI 진입을 위한 논문집을 만들 생각이었다. 1억 원 정도의 초기자본이 있으면 시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별도로 새로운 영문학회지 설립을 위해 1억 원의 조성자금을 마련했다. 영문 응급의학회(CEEM) 기반을 마련한 뒤 그 결실은 이사장 임기가 끝난 2014년에 이루어졌다.

유인술은 학회 최초로 정책 스테이트먼트(policy statement)를 만들어 공표하기도 했다. 학회의 모든 정책과 관련된 내용을 설정하는 것으로 응급의학과 의사가 지켜야 할 윤리 내용까지 포함했다. 학회에서 만든 이 정책 스테이트먼트는 나중에 대한의사협회 정책연구소에서 벤치마킹하기에 이르렀다.

유인술은 또 한국형 중증도 분류체계(KTAS)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KTAS(Korean Triage and Acuity Scale)를 만들게 된 배경은 응급의학 전문의가 일도 힘들지만, 수입도 꼴찌인 것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과 전문의는 외래에서 진료하면서 지정 진료 제도에 의해 수입에 따른 성과급을 가져가지만, 응급환자는 특성상 특진이나 지정 진료를 신청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타과 전문의와 비교할 때 응급의학 전문의는 힘들게 일하고도 성과급을 받을 수 없어 타과 전문의와 비교할 때 월급을 적게 가져가는 구조였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응급실에 근무하는 사람을 보상하는 수가를 개선하자는 차원이었다. 응급실에 근무하는 전문의에게 성과별로 보상함으로써 응급의료의 발전을 꾀하자는 취지였다. 유인술은 건강보험심의위원회 설득작업에 나섰고, 설득하려면 학회에서도 응급환자 개선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 이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때 고민하다 나온 것이 응급환자 중증도 분류를 하는 것이었다. 중증도 분류에 따라 중증도가 높은 환자는 응급의학 전문의가 직접보고 이에 대한 수가보상을 받는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이강현 교수와 일본을 방문해 JTAS(Japan Triage and Acuity Scale)를 벤치마킹했고, 중증도 분류의 원조인 캐나다 응급의학 학회로부터 CTAS(Canadian Triage and Acuity Scale)에 대한 저작권을 대한응급의학회가 단돈 1,000달러에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KTAS에 대한 판권과 저작권을 대한응급의학회가 소유하게 된 계기다. 이러한 개발과정을 거쳐 유인술 다음 이사장인 이강현은 본격적으로 중증도 분류를 시행하게 된다.

유인술이 학회 이사장을 할 때 제일 힘들었던 건 2012년의 응당법(응급실 전문의 당직법) 사태다. 응급실 전문의 당직 기준이 1995년부터 있었지만, 막상 응당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의료계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응당법과 관련해 의료계는 이 법안을 응급의학회가 주도했다고 생각해 학회에 비난을 퍼부었지만, 이 법안은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당시인 1994년부터 있었던 비상진료체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벌칙조항에서 병원에도 책임을 부과하는 내용만 추가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대한응급의학회가 마치 주도한 것처럼 오해를 받은 건 유인술에게는 억울한 일이었다.

 

응급의학 30년사 발간

 

대한응급의학회가 창립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응급의학의 역사를 제대로 다룬 도서는 없었다. 역사가 없는 민족은 소멸하는 것처럼 응급의학 30년 과정도 기록으로 남겨야만 학회의 발전이 있을 것으로 유인술은 생각했다. 30년 학회의 역사를 정리해야만 앞으로 50, 100년 학회의 발자취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응급의학 30년 동안 거의 모든 현장에 있었고, 학회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기록은 정사(正史)와 야사(野史) 2개로 나누었다. 정사를 쓰기 위해 그가 30년 동안 기록했던 자료와 학회 자료, 국가 정책 등을 찾고 검증했다. 1년 동안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219응급의학의 역사, 대한응급의학회 30(1989~2019)’이란 제목으로 도서가 발간됐다. 대한응급의학 30년의 역사가 이 도서에 그대로 담겨있다.

그는 지금은 대한응급의학회 야사를 쓰고 있다. 야사를 개인적으로 출판해 오프라인 학회가 열리면 학회 회원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줄 생각이다.

 

유인술 교수 프로필

 

학력

 

원광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원광대학교 의과대학원 석사

전북대학교 의과대학원 박사

 

경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응급의학교실 주임교수

대한심폐소생협회 이사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

대한의사협회 대의원

대한의학협회 대의원

대한외상학회 이사

삼남응급의학회 회장

권역응급의료센터협의체 회장

법원행정처 전문심리위원

대한응급의료지도의사협의회 회장

대한고압의학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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