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개설…독특한 수련방식 시행
대한응급의학회장 맡아 학회 등대 역할

 

혜화동 파출소 총기 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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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419일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대낮에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 영문도 모르는 주민들은 공포에 떨며 상황을 주시했고, TV 뉴스에서는 긴급속보가 흘러나왔다. 강원도 모 부대에서 탈영한 군인 임건진(가명) 일병이 K1 소총과 실탄 130, 수류탄 22발을 훔쳐 달아나 서울 도심에 진입했다는 내용이었다. 훈련이 아니라 무장탈영병과 군인과 경찰로 구성된 합동팀이 대치하면서 벌어진 실제 총격전이었다.

임건진은 혜화파출소 일대에서 민간인들에게 소총을 발사하고 수류탄까지 터뜨렸다. 군과 경찰은 그를 쫓으며 총을 발사했고, 마침내 그의 머리와 복부를 정조준해 쓰러뜨렸다. 임건진은 검붉은 피를 흘리며 승합차 사이로 쓰러졌다. 군인과 경찰이 임건진의 손과 배를 발로 짓눌러 상태를 파악한 결과, 그는 수십 발의 총탄을 맞아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임건진이 쏜 총에 맞아 민간인 1명이 사망하고 7명은 심한 부상을 입어 곧바로 인근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현장에서 즉사한 1명을 빼고 모두 서울대병원으로 실려간 것이다.

이러한 긴급상황을 전해 들은 윤여규 서울대병원 응급처치부장을 비롯한 외과 교수들은 하던 식사를 멈추고 급히 서둘러 응급실로 모였다. 응급실에는 총상을 입은 사람들과 의료진, 취재기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극도로 혼잡했다.

임건진은 총알이 머리에 관통되면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고, 양쪽 다리와 오른쪽 귀, 복부 등 12곳에 총상을 입었다. 인근을 지나던 중년 여성도 가슴에 총탄을 맞고 응급실로 급히 실려 왔다. 한꺼번에 7명이 응급실에 몰려와 의료진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들어 이 같은 대형사고는 물론 한꺼번에 중증외상환자가 몰려드는 사례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중증외상환자가 한꺼번에 응급실에 몰리자 윤여규는 서울대병원 외과에서 펠로우를 하고 있던 정영권을 비롯해 외과 의사들을 재빨리 소집했다. 윤여규는 응급처치부장으로 응급수술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신경외과, 흉부외과 전문의들도 긴급하게 연락을 취해 15분 만에 모두 수술장에 들어갔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외상에 관한 다양한 경험과 응급실장을 맡고 있었던 순발력이 그대로 발휘되면서 수술도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다행인 것은 마침 점심식사를 할 때라 수술장은 많이 비어있었고 마취과 의사도 확보가 가능해 곧바로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다. 평상시 서울대병원에는 넘쳐나는 환자와 계속되는 수술로 수술장은커녕 마취과 의사 확보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윤여규의 일사불란한 지휘로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심하게 총상을 입어 자칫 죽을뻔했던 임건진도 윤여규를 비롯한 서울대병원 의료진의 도움으로 무사히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서울대병원 응급실이 중증응급환자가 한꺼번에 몰려들어도 빨리 조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꾸준히 트레이닝을 해왔기 때문이다. 의료진은 중증환자가 급하게 들이닥쳐도 수술을 재빠르게 할 수 있는 훈련을 평소에 받아왔다. 외상의 정도에 따라 신속하게 환자를 분류하며 수술을 할 수 있도록 평소 훈련을 해왔던 윤여규의 준비로 인해 희생자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항상 준비된 곳에서는 환자의 희생이 그리 많지 않다. 응급의료센터는 순간이 중요할 정도로 시간과 인력이 필요하다.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환자의 희생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윤여규는 대량재난 등에 따른 준비된 시설과 의료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한 번 더 절실히 느꼈다. 중증외상환자에 대비한 외상센터 구축도 시급한 과제라고 여겼다.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개설

 

1987년 초 서울대병원 김진복 교수가 윤여규를 불렀다. 김진복은 위암 수술 세계 최고 권위자로 외과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윤여규는 당시 경희대병원에서 외과 교수로 3년 넘게 근무하고 있었다.

윤 교수! 너가 외상이 딱 체질에 맞을 것 같다. 서울대병원에 와서 외상학을 맡아서 해라.”

? 외상학이요?”

서울대에서 외상학이나 응급의학을 시작해 보려고 해도 외과에서 이거 할 놈이 없어…….”

당시 대한민국에는 외상학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돈도 되지 않고 다른 분야보다 훨씬 힘들다는 인식이 퍼져 누구도 쉽게 하지 않으려 했다.

윤여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분야인 데다 3D업종으로 알려져 있는 외상학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모교인 서울대로 돌아가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외상학이 생소했지만, 모교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건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곧바로 제안을 수락했다.

36개월 동안 있었던 경희대병원 외과 교수를 마치고 서울대 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윤여규는 외과 교수로서 외상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응급실도 맡게 됐다. 윤여규는 19879월부터 서울대병원에서 외상을 맡으면서 응급실을 책임지게 됐다. 응급실과 외상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외상을 하던 사람들이 응급의학을 겸하는 일이 많았다.

그 당시에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응급의학과가 생겨 전공의들이 수련을 받고 있었지만, 서울대병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립 의과대학과 달리 국립 의과대학에서는 학과 개설 과정이 쉽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응급의학과가 개설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것도 제도권으로 들어와 쉽게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윤여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울대병원 응급실도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에서 보건복지부에서는 서울대병원에 응급의학과가 빨리 만들어지기를 바랐다. 서울대병원에 응급의학과가 들어서야 다른 대학병원에 미치는 파급력이 클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서울대병원에 응급의학과가 들어설 수 있도록 복지부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윤여규와 복지부 사이에 개설 과정에서 약간의 이견도 있었지만, 결국 1996년 서울대병원에 응급의학과가 개설됐다.

응급의학과를 개설한 윤여규는 전국 최고의 응급의학과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를 응급의학의 메카로 만들고 싶었다. 이를 위해 하나하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 나갔다. 정형외과와 영상의학과, 순환기 내과의 훌륭한 전문의들과 임상강사들로 교수진을 구성했다. 또 우수한 전문의를 뽑아 트레이닝을 시킬 계획을 세워놓았다.

윤여규는 1996년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제1회 레지던트로 신상도와 김성혜를 뽑고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레지던트를 응급실에서 수련을 시키지 않고 다른 임상과를 돌리는 독특한 과정으로 운영했다. 1년차 때에는 응급실에 레지던트를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응급의학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응급의학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내과, 외과 등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술기를 먼저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내과, 외과, 방사선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을 돌며 기본 과정을 다양하게 익히도록 했다. 1년차와 2년차는 무조건 다른 과로 파견을 보냈다. 3년차부터 응급실에서 근무하게 하며 자기 전공 분야를 더 익히도록 했다. 이 같은 수련방식은 서울대병원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시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수련을 시행한 결과 전공의들의 변화도 감지됐다. 첫째, 다른 과 전공의들과 유대관계가 좋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둘째, 다른 임상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셋째, 레지던트들이 다른 과에서 술기를 배우고 응급실에 왔을 때 그동안 배운 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처방하고 치료해야 하는지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윤여규의 레지던트 트레이닝의 새로운 시도는 큰 효과를 봤다. 레지던트들은 대인관계가 좋아졌고, 병원의 전반적 흐름을 알 수 있었으며, 응급실에서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모든 과정을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전통이 지금도 내려오면서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의 전공의 교육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소문들이 퍼지면서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몰렸다. 레지던트 지원도 크게 늘었으며, 펠로우들도 넘쳐났다. 윤여규는 실력이 뛰어난 펠로우들을 끌어들이며 짧은 시간에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를 전국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의 독특한 교육시스템과 환자를 대하는 태도, 꾸준한 연구를 통한 실력 배양 등이 알려지면서 뛰어난 의사 양성소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승인 윤여규에게 단순히 의사 양성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잘 훈련받은 제자들이 각 병원에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취업 자리까지 책임지는 게 스승으로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항상 발 벗고 나서 제자들의 길을 터주려고 노력했다.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출신이 다른 대학병원 응급실을 적극적으로 개설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으며, 응급의학과가 새로 생기면 그곳으로 찾아가 제자들의 취업도 부탁하곤 했다.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가 스승과 제자 사이에 더욱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된 것은 윤여규의 제자 사랑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윤여규가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를 개설하고 기틀을 만들었다면, 그의 제자이자 후배인 서길준 서울대 의대 교수는 윤여규의 뜻을 이어받아 응급의학과를 더욱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여규가 응급의학과와 외상학의 발전을 위해 마음 놓고 대외활동을 활발히 벌일 수 있게 된 배경 중 하나는 서길준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외상 관련 논문발표 등 끊임없는 학술연구

 

윤여규는 SCI 논문 발표를 비롯해 학술연구에도 쉬지 않고 노력했다.

그는 198910월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으로 장기연수를 떠난다. 윤여규는 그곳 연구교수로 활동하며 공부에만 매진했다. 중환자의 치료와 관리, 성장호르몬, 영양학 등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에 힘입어 1989~19902년 동안 SCI 논문을 17개나 쓰는 진기록을 세웠다. SCI 논문은 전 세계 학계에서도 권위를 인정하고 있으며 까다롭고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심사하고 있어 선정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윤여규는 하버드 대학 병원에서 실험과 연구 활동에만 전념하며 연구를 향한 열정에 혼신을 다하며 학자로서 진면목을 보여줬다.

이후 1996년에는 Demling 하버드 의대 교수와 함께 외과 중환자 관리를 다룬 교과서 Surgical Critical Care, Color Atlas of Thyroid Surgery의 한 챕터를 집필했다. 이 책은 외과 중환자를 다룬 내용으로 한국 외과 의사가 미국 전문의와 공동으로 저술한 건 윤여규가 처음이었다. 2013년에는 갑상선 수술 교과서 Color Atlas of Thyroid Surgery영문판을 세계적인 의학전문 출판사인 스프링거(Springer)에서 발간할 정도로 저술 활동도 활발했다.

 

대한응급의학회장 맡아 학회 등대 역할

 

대한응급의학회 초창기에는 학회에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신생학회였기 때문에 비교적 젊을 수밖에 없었다. 젊다는 것은 활동성이 있어 좋지만, 학회가 제대로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경륜 있는 사람이 나서 조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도 필요했다.

윤여규는 대한외상학회에서만 13년 연속 임원진으로 활동해 조직관리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대한외상학회 회장, 대한화상학회 회장, 대한내분비외과학회 회장, 아시아태평양화상학회 회장 등 당시 대외적으로 다양한 활동도 펼치고 있었다. 학회에는 윤여규처럼 풍부한 경험을 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신생학회인 대한응급의학회 입장에서는 학회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윤여규와 같은 경륜 있는 어른이 필요했다.

대한응급의학회는 2005년 회장으로 윤여규를 선출한다. 이후 그는 학회 이사회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대외적인 활동은 물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응급의학과는 전문의를 취득하고 난 뒤 개업을 하는 학회가 아니었다. 정부 시책과 맞아떨어지는 일을 해야 하는 공공의료의 성격이 강했다. 우리나라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프런트 라인이었다. 이 때문에 윤여규는 대외적으로 국회와 보건복지부 등과 상대하며 학회를 소개하는 한편 공공의료인 응급의학의 중요성을 알리는 일에 주력했다. 그는 조직관리 경험을 바탕으로 학회의 흐름을 주도했으며, 대외적으로 학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갑상선 분야 전국 최고 명의(名醫)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처음으로 외상학을 시작하고 응급의학과를 개설한 윤여규는 남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갑상선이라는 또 다른 분야를 알게 된다.

그는 평소 수술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던 중 외과 선배로부터 갑상선 분야를 연구하고 수술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그는 갑상선에 관한 의학적 연구가 부족해 이를 전공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수술도 여러 면에서 그와 잘 맞았다. 자주 수술을 하다 보니 실력도 늘고 갑상선 환자도 그리 많지 않아 당시에는 큰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서울대병원 응급의학 개척자로서 살아왔지만, 새로운 분야인 갑상선을 연구하고 수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제안을 수락한다.

윤여규는 서울대 외과 갑상선 분야 교수로 옮겨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서울대병원에서 갑상선암을 수술하고, 수요일에는 미처 보지 못한 외래 환자를 진료했다. 이어 목요일에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금요일에는 보라매병원에서 수술을 연속으로 하는 등 쉬지 않고 수술과 외래에 전념했다.

워낙 수술을 많이 해 하루 14건의 갑상선암 수술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환자를 많이 보기 위해 보직인 주임교수까지 스스로 내려놓을 정도로 갑상선에 관심이 많았다. 수술을 많이 하다 보니 술기도 늘고 새로운 수술방법도 연구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흉터가 잘 보이지 않고 부위도 조그맣게 수술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물론 로봇 수술 방식을 도입했다.

2004년에는 세계 최초로 ‘BABA 내시경 수술을 개발했다. BABA 수술은 목 부위 수술 흔적으로 고통받는 갑상선암 환자들을 위해 양측 겨드랑이-유륜 접근수술법(Bilateral Axillo-Breast Approach, BABA)’으로 수술 흔적을 최소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갑상선 절제 수술 시 목 부위에 상처를 내지 않고 겨드랑이와 가슴 부위 절개를 통해 수술하는 방법으로, 목 부위를 절개하지 않기 때문에 수술 부위 유착이 적고 노출 부위인 목에 흉터를 남기지 않아 미용 측면에서도 만족도가 높았다.

수술 실력이 쌓이면서 윤여규는 갑상선 분야 명의(名醫)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명의로 선정된 데다 상처가 잘 보이지 않게 갑상선 수술을 잘하고 친절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서울대병원에는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외래진료가 있는 날에는 고작 2시간에 60여 명의 환자가 몰렸다. 2분에 한 명꼴로 진단하고 처방한 것이다. 환자가 너무 많아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일도 많을 정도로 서울대병원에 갑상선 질환 환자가 넘쳐났다.

윤여규는 밀려드는 외래 환자를 한꺼번에 진료하고 처방하는 데 한계를 많이 느꼈다. 서울대병원에서 갑상선을 진료하고 치료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2015년 개업을 하게 된다. 여유롭게 환자의 아픈 부분을 소상히 듣고 이에 따른 처방을 하는 것이 자신과 환자에게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의사를 만드는 의사가 되어라!

 

윤여규는 환자 보는 것과 수술하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생소한 의학 분야를 처음으로 도전하며 새로운 술기를 개발하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의사로서 그는 인류에 이바지하는 걸 연구하고, 단순히 의사가 되기 위한 것보다 의사를 만드는 의사가 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왔다.

의사는 환자를 보는 데 재미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자를 보기 싫어하는 의사는 의사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응급의학 전문의도 응급환자가 왔을 때 재미를 느끼고 치료에 대한 호기심을 가져야만, 환자를 위하는 응급의학 전문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윤여규는 환자에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의사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여겼다.

말투를 반말투로 하는 의사도 있는데, 환자는 압니다. 이 사람이 목에다 힘주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위해 하는 말인지 다 알죠. 의사는 항상 환자를 도와줄 생각을 해야 합니다. 환자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치료해주면 나중에 환자들이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고맙다는 생각을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그는 외과 레지던트 1년 차 때 한 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정성을 다해 환자를 치료했다. 비록 그 환자가 두 달 뒤 운명했지만, 유가족들은 윤여규가 환자에게 대하는 정성을 고맙게 생각해 나중에 집으로까지 찾아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윤여규 교수 프로필

 

학력

 

서울대 의대 졸업

대학원 의학 석·박사

응급의학과·외과 전문의

 

경력

 

경희대 의대 일반외과 교수

미국 Harvard Medical School Boston. MA. U.S.A. 연구교수

서울대 의대 교수

서울대병원 응급처치부장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장

대한외상학회 회장

대한화상학회 회장

대한내분비외과학회 회장

아시아태평양화상학회 회장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대한외과학회 이사장

대한재난응급의료협회 회장

대한갑상선학회 부회장

대한임상종양학회 회장

대한외과학회 회장

국립중앙의료원장

강남베드로병원 윤여규 갑상선 클리닉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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