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초로 응급실에 ICU 및 영상의학 접목해 운영
응급의학 전문의시험 출제형식 세분화 등 시스템화해

미국 응급실에서 배운 프로정신

 

- 버니지아 의과대학 연수

 

19898월 초, 미국 버지니아 의과대학(Medical College of Virginia) 부속병원 응급실에 흑인 남자가 복부에 피를 흘리며 응급실로 급하게 실려 들어왔다. 총상을 입은 환자였다.

외상학 및 응급의학 연수를 위해 81일 이곳 교환교수로 온 고영관 경희대병원 교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경희대병원에서 응급실장을 맡고 있어 교통사고 환자 등은 대수롭지 않게 처치한 적은 있었지만, 총상환자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교환교수로 오자마자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총상환자를 마주쳐 은근히 걱정됐다. 그러나 고영관과는 달리 미국의 응급의학 전문의들은 또 총상환자가 왔다는 식으로 중얼거리며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총상 환자들을 너무 자주 봐와 늘 하던 방식으로 일상적인 환자 대하듯 다뤘다.

고영관은 매뉴얼대로 치료에 앞서 정맥 주사를 놓을 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흑인 남자의 몸을 살펴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팔을 걷어붙이자 궤양 자국이 온몸을 난도질하듯 덕지덕지 덮혀 있었으며 피부가 성한 곳이 없었다.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정맥을 따라 놓으려고 한 주사 자국 부위가 출혈이 생기면서 온몸에 상처투성이었다. 주사를 놓아야 할 곳은 거의 다 궤양이 있고 오염되어 있어 도저히 주사를 놓을 데가 없었다.

주삿바늘 자국으로 인한 궤양이 흑인의 피부를 난도질하고 있었고, 한눈에 봐도 마약을 상습적으로 했던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마나 주사를 많이 맞았으면 정맥 주사를 놓을 자리조차 없을까? 고영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나?’

하지만 빨리 응급처치를 하고 총알 제거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복부에 총알이 관통해 어느 내장을 얼마만큼 박살냈을지 아무도 몰랐다. 빨리 배를 갈라 손상부위와 몸속에 박혀 있는 총알이 찾는 것이 시급했다.

고영관은 그래도 궤양이 없는 대퇴 정맥에 주삿바늘을 힘껏 찔렀다. 그러나 들어갈 리 없었다. 다시 시도했다. 억지로 대퇴부 및 쇄골하 정맥 주사를 놓고 복부를 그대로 갈라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는 외과 전문의였다. 경희대병원 응급실장으로 있으면서 다양한 환자 경험을 겪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환자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고영관이 머무르고 있는 버지니아 리치먼드 병원 응급실에는 총상환자가 없는 날이 없었다. 마약 때문이었다. 하루 평균 마약으로 인한 총상 환자가 2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리치먼드는 마약의 도시였다. 마약상들이 플로리다에서 뉴욕까지 마약을 운반하면서 이곳을 중간 지점으로 생각하고 거쳐 가면서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그냥 총질을 해대는 일이 많았다.

 

- 듀크 메디컬센터 연수

 

고영관은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이어 듀크 메디컬센터(Duke University Medical Center)에서 교환교수로 6개월 동안의 외과중환자관리 연수를 이어갔다.

듀크 의과대학은 미국의 3대 의과대학 중 하나다. 듀크 메디컬센터 외과가 다른 곳보다 2년이나 트레이닝이 더 길지만, 지원자들은 항상 넘쳐났다. 더욱이 외과 교과서를 지은 저자 세비스턴이 이곳 교수로 있어 그에게 조금이라도 술기를 배우려는, 세계 곳곳에서 온 외과 전문의들로 붐볐다. 고영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고영관은 새벽 415분에 일어나 오전 6시부터 11시까지 회진을 돌았다. 이어 1시간 동안 콘퍼런스를 하고 정오에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는 환자치료에 동참하면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미국의 응급실도 한가로울 리 없었다. 오히려 우리나라 응급실보다 근무 강도가 더 셌다. 우리나라는 응급실이 단지 환자만 분류하는 역할을 맡는 곳이어서 응급실장 하기에 따라 일이 많을 수도 아니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우리나라 응급실과는 구조적으로 달랐다.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를 중증도에 따라 분류하고 치료하는 과정이 이어지며 잠시라도 쉴 틈이 없었다.

응급환자가 오면 과별 협진이 잘 되는 것도 우리와는 다른 부분이었다.

우리는 중환자가 오면 관련된 과들이 돌아가며 이중, 삼중으로 찔끔찔끔 상태를 보면서 서로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환자의 상태 및 진단이 어려울 것 같으면, 아예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환자가 잘못되면 그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기 때문에 기피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응급의학과가 수술 전 충분히 환자를 처치한 뒤 수술장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철저히 관리했다. 그 중심에 응급의학 전문의가 있었다. 응급의학 전문의는 다른 과 전문의들이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재능을 가지며 환자치료에 집중했다.

예를 들어 긴장성 기흉 환자가 오면 응급의학 전문의들은 곧바로 응급처치를 시도한다. 폐렴이나 교통사고 등 외상으로 폐가 찢어지면서 공기가 자꾸 빠져나가 생기는 기흉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생명까지 위험해진다. 이 때문에  흉관삽관 등의 긴급처치를 시도한다.

환자에게 곧바로 응급조치를 취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이 잘도 해가고 있었다. 긴장성 기흉을 제대로 처치해 치료에 도움을 주는 식이다. 응급의학 전문의가 아니라면 긴장성 기흉 처치 방법을 대부분 잘 모른다. 신속하고 정확한 진단을 한 뒤 응급처치를 해서 안정화하고, 다음에 결정적인 치료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게 이들의 응급의학 모토였다.

고영관에게 미국 응급실 경험은 응급의학은 물론 외상 중환자 치료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외과 교과서를 지은 저자 세비스턴 교수(왼쪽)와 기념사진을 찍은 고영관 교수
외과 교과서를 지은 저자 세비스턴 교수(왼쪽)와 기념사진을 찍은 고영관 교수

 

미국 응급실 경험, 경희대병원에 벤치마킹

 

버지니아 의과대학과 듀크 메디컬센터에서 머무른 1년 동안 고영관은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미국의 의료수준이 대한민국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느꼈다. 미국 응급실에 거의 죽다시피 실려 왔던 중환자들이 신속한 검사와 응급처치로 다시 회복되는 걸 보고 미국 의료진들의 첨단 의료시설과 의료진들의 열정은 대단함을 넘어 존경의 대상이었다. 고영관에게 미국 응급실의 경험은 향후 응급의학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중요한 모티브였다.

 

- 응급실에 ICU 운영

 

고영관은 외상환자와 응급 중환자의 초기 치료가 중요하다는 걸 미국 연수 과정에서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 응급의학 전문의가 초기처치를 잘하는 게 환자 예후에도 좋다는 것을 느꼈다.

이는 곧 응급실에 응급중환자실(EICU·Emergency Intensive Care Unit)을 운영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환자에게 크게 도움이 됐다고 판단하고 우리나라 응급실에도 중환자실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경희대병원 응급의학과는 다른 대학병원과 비교해 개설이 늦었다. 1997년 늦게 시작했지만, 고영관은 미국에서 배운 응급의료 운영방식을 그대로 경희대병원에 벤치마킹했다. 응급실에 중환자가 오고 나서 어느 특정 과로 입원이 잘 안 되거나 늦어지면 2~3일간 EICU에서 기본적으로 응급치료를 한 뒤 수술 또는 후속 치료를 할 수 있도록 도왔고, 외과계 중환자를 입원시키는 외과중환자실도 응급의학과가 관리했다. 당시 대학병원 대부분은 응급실만 운영하는 것도 벅차 다른 걸 할 엄두도 내지 않았다. 병원 경영진도 응급실만 운영하는 게 비용을 줄일 수 있어 소극적인 경영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경희대병원은 다른 병원과 달리 응급실에 중환자실인 EICU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 같은 시도가 응급의학과는 물론 다른 과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우선 신생 과인 응급의학과의 병원 내 빠른 정착에 기여했다. 보통 다른 대학병원 응급의학과는 기존 과와 환자치료 영역 싸움으로 인해 관계가 다소 불편한 편이다. 그러나 경희대병원에서는 수술하고 환자의 예후가 나빠지면 응급의학과가 관리해 서로 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응급의학과는 2~3일 동안 응급중환자실에서 충분하게 응급치료를 하고 안정화한 뒤 관련 과에 환자를 넘겼다. 응급실에서 중환자 관리까지 해주니까 다른 과도 편했다. 정형외과, 흉부외과, 외과에서 중환자가 생기면 다 응급의학과에 의뢰할 정도였다. 과별 영역 싸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과가 신생 응급의학과에 고마움을 느끼며 더 협조적이었다.

환자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입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입원도 빨라져 환자에게도 안정적이었다.

경희대병원이 전국 처음으로 응급실에 EICU를 설치해 반응이 좋아지자 다른 대학병원도 이를 도입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응급의학의 영역이 더 넓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 응급실에 영상의학 접목

 

고영관은 신속한 진단 및 응급처리를 할 수 있도록 영상의학과 전문의를 응급의학과에 영입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도를 단행했다. 경희대병원 응급의학과 만의 독특한 실험이었다.

그동안 응급환자가 오면 진단 절차가 복잡해 환자치료 지연의 사유가 되곤 했다. 응급실에 환자가 오면 환자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의료기기로 신속하게 진단하는 게 중요하다. 제대로 된 진단은 제대로 된 치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료기기의 판독능력은 중요했다. 영상의학과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대부분 병원이 응급의학과와 영상의학과가 각각 따로 있어 영상의학과 전문의의 최종 판독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 결과를 보고 처방을 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보통 병원에는 응급실 내에 CT나 초음파를 찍을 전문의가 없다. 이 때문에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영상의학과에 의뢰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 등이 길어 치료가 늦어졌다. 병원에서는 방사선 촬영뿐만 아니라 CT, 초음파 등을 이용해 신체 부위의 영상을 얻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영상의학과에 많이 의존했다.

특히 1990년대 응급실에는 독성 환자 및 중독 환자가 넘쳐났지만, 이들 환자가 오면 응급의학 전문의가 환자의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찾기가 쉽지 않았다. 병명을 놓치는 부분도 많았다. 환자도 자신의 병을 잘 몰라 영상을 촬영하고 난 뒤 발견된 질병도 자주 있었다.

미국 응급실에는 첨단의료장비를 들여놓고 영상의학 전문의가 곧바로 판독해 응급환자 치료가 빨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협진 자체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병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해 환자의 치료가 지연되는 상황이 자주 있었다. 고영관은 그런 부분을 항상 개선하려고 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그는 1999년 홍훈표 영상의학 전문의를 교수로 영입한다. 응급환자가 오면 신속히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이후 경희대병원 응급실은 질적으로 도약한다.

지주막하 출혈(subarachnoid hemorrhage) 환자는 응급실에서 놓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대개 증세가 나타나지 않다가 갑자기 심한 두통과 구토를 일으키고 의식을 잃어 혼수상태에 빠져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웠다. 진단이 신속하게 내려질수록 환자의 예후는 좋았다. 지주막하 출혈을 모르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오면서 CT 판독능력과 초츰파 술기가 좋아져서 신속하게 병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어 여러 부작용과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고영관의 새로운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응급실 내에 영상의학 전문의가 항상 대기하고 있어 영상 판독 및 치료 방향까지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었다. 응급환자가 왔을 때 응급실에서 CT, 복부 초음파를 실시해 신속한 진단이 가능했다. 외상도 어디를 다쳤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응급실에서 신속하게 진단하고 치료도 바로 들어갈 수 있어 응급의료의 질이 올라갔다.

이 때문에 경희대병원 응급의학과 출신이라면 다른 병원에서도 무조건 영입할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전공의 지원도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응급의학 전문의 2차 실기시험에 탁월한 성적을 낼 수 있게끔 탄탄한 실력까지 갖춰나갔다.

 

- 영양공급팀 구성해 환자치료

 

고영관은 중환자 관리를 계속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양집중지원 문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중환자들은 많이 다쳐 거동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먹지도 잘 못 한다. 이로 인해 중환자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어떻게 음식을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도 응급의학 전문의이자 외과중환자관리실장으로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치료 과정 중 하나였다.

중환자들은 스스로 먹지 못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영양분을 공급해줘야 한다. 영양공급 방법은 위나 장에 관을 넣어 영양공급을 하는 경장영양(enternal nutrition)공급, 정맥에 영양공급을 하는 정맥영양(parenteral nutrition) 등으로 크게 나뉜다. 영양공급 문제까지 응급의학과에서 담당하면서 응급의학의 영역이 점점 넓어졌다.

고영관은 2000년 경희대병원에 영양집중지원팀을 만들었다. 환자에 따라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이 필요한 것을 분석하고 따로 처방해 치료에 나섰다. 영양사가 1차로 환자에게 필요한 영양분 등을 분석한 자료를 고영관에게 건네면, 그는 수정하거나 평가한 뒤 이를 약사에게 보내면 조제를 하는 식이었다. 이어 간호사가 환자에게 최종적으로 영양을 공급해주는 것이다.

이는 의사뿐 아니라 중환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환자에게 영양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치료도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다. 처음에 응급의학과에서는 환자에게 하는 영양공급이 치료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영관만은 달랐다. 영양공급과 치료가 병행되어야만 환자의 회복이 빨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이 같은 영향이 다른 대학병원 응급실에도 미쳤으며, 중환자에게 영양공급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한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중증환자에게 영양공급을 집중적으로 하면서 관리를 시도한 고영관은 정년 퇴임할 때까지 경희의료원 영양집중지원팀장을 하며 중환자의 영양을 책임졌고, 외과중환자실장도 정년 때까지 맡았다.

 

중환자들에게 영양을 제대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환자에게 다양하고 심도 있게 영향을 미칩니다. 처음부터 중환자에게 신경을 쓰고 초기 치료를 잘해야 회복이 빨라집니다. 이는 응급의학 전문의가 해야 할 기초적인 업무 중 하나죠.”

 

군소병원 응급실에서는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큰 병원에서는 응급의학 전문의가 중증환자까지 돌봐야 하는 일이 생기니까 영양공급 부분까지 반드시 신경을 써야 한다고 고영관은 생각했다.

2009년 5월 부산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인 아시아응급의학회
2009년 5월 부산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인 아시아응급의학회

 

대한응급의학회 국제 위상 높여

 

고영관은 1989년 대한응급의학회 창립준비위원회 결성 때부터 참여했던 응급의학과의 산증인이다. 초대 학회 때부터 계속 학회 이사를 하면서 국내에 응급의학을 알리고 학문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 노력이 해외에서도 이어지면서 하나씩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2007년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응급의학연맹 주최 세계응급의학회에서 그는 한국의 응급의학회를 처음으로 외국 다른 나라에 소개하는 일을 맡았다. 그때까지 국제학회에서 대한민국 응급의학이 소개된 적은 없었다. 고영관은 황성오 원주세브란스병원 교수와 각 대학병원에서 온 레지던트들과 함께 캐나다에 간 뒤 우리 응급의료의 현 상황을 소개하며 대한민국에서 국제학회를 개최할 수 있는 역량도 갖추고 있다는 걸 강조했다. 이후 우리나라 응급의학은 해외 학회와 활발한 교류를 하며 점점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러던 중 2009년 학회 차원의 중요한 국제행사 개최 여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 그해 고영관은 대한응급의학회 회장이었다. 20095월 부산에서 국제학술대회인 아시아응급의학회를 개최하기로 했지만, 학회 회장으로서 이를 그대로 강행할 것인지 아니면 취소할 것인지를 결정할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

그해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곳곳은 신종플루 유행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2009년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신종플루 바이러스는 H1N1으로 20세기 초 5,000만 명의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스페인 독감의 원인 바이러스와 같았다. 그렇기에 일반인들의 공포가 더 컸다. 신종플루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전염병 중 하나였다.

회장으로서 고영관은 고민했다.

학회 차원의 결정이 자칫 신종플루 대유행의 물꼬가 되는 빌미를 준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학회 차원의 고민도 깊었다. 대회를 연 뒤 만에 하나라도 잘못해 신종플루가 유행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대회 개최를 위해 들어간 돈도 만만치 않았다. 하고는 싶었지만, 부작용이 있을 것에 대비해 대회를 개최하는 것 자체가 골치 아팠다. 대회를 열었을 때 외국에 있는 의사들의 참여 여부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학회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알리기에는 이만한 대회가 없었다. 예정대로 대회를 여는 것이 학회 발전을 위한 길로 판단하고 고심 끝에 강행이라는 카드를 던졌다.

다행히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신종플루 환자가 적었고, 이 영향 때문이었는지 대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대한응급의학회가 국제학회를 처음으로 개최한 것 자체가 큰 경험이었다. 아시아에서 응급의학회 국제회의를 개최한 국가는 몇 나라 되지 않았다. 이 대회를 계기로 대한응급의학회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올라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 등의 결과물은 나중에 2019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열린 세계응급의학회 개최까지 이어졌다.

제1회 응급의학과 전문의 시험 합격자 기념사진

 

응급의학 전문의시험 시스템화

 

1996223일 제1회 응급의학 전문의시험을 치르기 위해 학회 내에 고시위원회가 꾸려졌다. 위원회는 자격시험을 위한 지침서를 수립하고 1년이 넘게 세부사항을 점검해나갔다. 그러나 시행 초창기여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시험문제를 출제할 전문툴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출제과정도 복잡했고 시간도 길어졌다. 1996년부터 정식 과목으로 인정받은 응급의학과 전문의시험 방식을 대대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2001년 대한응급의학회 고시위원장으로 임명된 고영관은 우선 전공의시험 전문툴부터 바로잡아나갔다. 응급의학 과목이 정식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전문의시험을 체계적으로 시스템화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고영관은 우선 출제형식이나 분야별로 세분화했다. 환자 진료에 필수적이면서 실질적인 지식 및 기술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개선할 계획을 세웠다. 다양한 임상 양상을 포함한 실제 진료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시험방식으로 바꿔나갔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자격시험의 전문성에 대한 평가 수준을 높이기 위해 기존의 출제 정책을 탈피하고, 환자를 보다 정확하게 전문적으로 진료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전문의를 배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출제 정책의 변화가 필요했다.

고영관은 각 의과대학 응급의학교실에 문제를 의뢰한 뒤 만들어진 문제를 수정하고 문제은행화했다. 출제형식은 어떻게 하고, 문구는 어떻게 하며, 구체적인 교육도 어떻게 할 것인지 하나하나 세부적인 지침까지 일일이 만들었다. 대한의사협회에서 관련 자료도 얻어 고시위원회에서 활용했다.

응급의학 전문의시험이 점점 체계를 갖추어나갔다.

고대안암병원 홍윤식 교수(왼쪽)와 함께 해외 연수를 갔던 고영관 교수
고대안암병원 홍윤식 교수(왼쪽)와 함께 해외 연수를 갔던 고영관 교수

 

KTAS 기초인 외상스코어 도입

 

제대로 된 진단도 하지 않고 환자치료를 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효과적인 외상환자 중증도 분류 도구가 필요했다. 응급의학 전문의가 외상환자가 왔을 때 빠른 판단으로 소생술 및 치료 방침을 결정하면 환자의 예후에도 좋았다.

고영관은 공저(共著)로 쓴 외상학을 통해 외상스코어를 만들어 환자의 중증도에 따라 분류해야 한다는 것을 문제제기했다. 지금은 외상이 응급의학과와 차이가 있지만, 초창기에는 외상과 응급의학은 거의 비슷했다. 응급의학이 점점 세분화하면서 외상학이 따로 학문으로 분화되었지만, 아직도 외상학은 응급의학 영역과 관련이 많다.

고영관이 응급의학을 시작할 때만 해도 중증도 분류가 전혀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응급상황에 따른 치료의 우선순위가 정해지지 않아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외상에 따라 분야별로 환자를 점수화한 외상스코어가 만들어져 지수에 의해 환자 처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응급의학 전문의는 이 수치에 따라 어떤 처치를 하고, 영양공급은 어떻게 하며, 어떤 경로로 영양을 공급하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중환자실로 옮길 것인지 등 여부를 판단하면 됐다.

응급의학 전문의에게 중증도 분류는 중요한 일이었다. 진료 가이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환자가 왔을 때 치료 가능 여부, 더 큰 병원으로 이송 여부를 외상스코어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외상스코어 판단은 입원을 시킬 것이냐, 입원만 시키고 일반 병실에서 치료할 것인지, 중환자실로 옮길 것인지, 수술할 것인지 등을 결정하는 기초적인 작업이었다.

고영관 등이 외상학 책에 쓴 외상스코어는 2016년부터 전국의 모든 응급의료기관에서 사용한 한국형 중증도 분류(Korea Triage and Acuity Scale, KTAS)의 기초가 되었다. KTAS가 만들어지기 전 외상스코어가 환자의 중증도 상태를 분류했던 지침이었다.

외상환자의 중증도 분류는 환자가 응급실에 있는 시간을 크게 줄여 응급실 과밀화 해소에 도움을 줬다. 또 중환자실 입원율과 사망률을 예측할 수 있는 좋은 분류 도구로 자리잡았다.

 

고영관은 중증환자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많은 중증환자에게서 발생하는 쇼크의 진단 및 치료가 중요하다고 느꼈다. 응급의학에서 쇼크 연구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는 2011년 홍윤식 고대안암병원 교수, 서길준 서울대병원 교수와 함께 대한쇼크연구회를 만들었다. 내과 질환에 의한 쇼크를 비롯해 외상에 의한 쇼크까지 모든 분야의 쇼크를 다뤄 중증환자를 제대로 치료하자는 취지였다.

 

이 같은 고영관의 다양한 학술적, 사회적 공헌 등을 인정받아 그는 2013년 의학한림원 정회원으로 선출됐다. 한림원은 학술논문 및 저술, 학회 공헌과 사회공헌 등을 총점으로 따져 정회원을 선출한다. 전체 회원 수가 400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의학계에서는 권위를 인정받는 모임이다. 학회 공헌과 논문 실적, 대외적인 활동 등이 뛰어난 고영관에게 의학한림원이 정회원으로 뽑은 것이다.

테니스를 즐기고 있는 고영관 교수
테니스를 즐기고 있는 고영관 교수

 

정년퇴임 후 여유를 찾은 삶

 

2017년 경희대병원을 정년퇴임한 고영관은 20191월부터 충남 당진 현대제철 부속의원에서 근무하며 2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직원들을 상대로 의학 상담이나 산재 및 건강검진과 관련한 상담과 치료를 하면서 여유 있는 삶을 누리고 있다.

 

대학병원 응급실 근무는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응급환자들이 수시로 오기 때문이죠. 특히 저는 중증환자 관리를 많이 해 환자치료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스트레스로 이어졌죠. 그러나 이곳에 와서는 너무 편합니다. 시간이 많아 제가 좋아하는 운동도 마음껏 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편하게 여생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주중에는 충남 당진시에 있는 현대제철 사내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주말에는 서울 집으로 돌아와 테니스를 치며 건강을 관리한다.

고영관의 테니스 실력은 수준급이다. 19961,000여 명의 전국 교수들이 참가해 치른 전국교수테니스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 35세부터 취미로 시작한 테니스가 그의 건강을 지켜주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 대부분 골프를 합니다. 라운딩은 하루종일 걸려 응급환자가 왔다는 긴급콜을 받아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죠. 그러나 테니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파트 내 시설에서도 칠 수 있고, 병원에서 콜이 오면 바로 갈 수 있어 좋습니다. 그래서 테니스가 저에게 맞았습니다. 테니스로 스트레스도 풀고 햇빛도 째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답니다.”

 

그의 집안은 의사가 많다. 그를 포함해 3형제 모두가 의사이며, 딸을 비롯해 친척들도 의사가 많다. 그는 형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기 위해 미국 의사자격시험인 ECFMG1979년에 합격했으며, 1982년에는 미국에서 개업할 수 있는 연방자격시험인 FLEX까지 합격했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그곳에서 의사가 되지는 못했다. 대신 대한민국에서 응급의학 전문의로서 한길을 계속 걸어왔다. 인생을 돌이켜볼 때 응급의학을 전공한 게 자랑스럽다고 여긴다.

 

응급의학과의 역할은 아주 많습니다. 수술 전 단계에서 응급의학과 전문의만한 의사가 없습니다. 수술 준비하고 환자를 안정화할 수 있도록 돕는 건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최고죠. 저도 처음에는 외과를 했지만, 이제 응급의학과가 최고라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응급의학 전문의는 수술만 직접 않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환자에게 일어나는 응급상황을 신속하게 처치하는 술기는 다른 과 어떤 전문의도 따라올 수 없죠. 심폐소생술이나 쇼크가 발생하면 정형외과 의사는 물론 내과 전문의들도 제대로 처치를 할 수 없습니다. 야간에 종합병원에 가면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모든 걸 결정적으로 하죠. 응급의학과가 대단합니다. 옛날 1990년대와 비교하면 정말 천지 차이가 납니다. 응급환자가 왔을 때 초기에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어 보람이 많았습니다.”

의학한림원 회원들과 함께
의학한림원 회원들과 함께

 

고영관 교수 프로필

 

학력

경희대 의과대학 졸

동 대학원 의학박사

일반외과 전문의, 응급의학과 전문의, 스포츠의학 분과전문의, 중환자의학 세부전문의

 

경력

미국 버지니아 의대병원 교환교수

미국 듀크 메디컬센터 교환교수

경희대 의과대학 응급의학과 교수

경희대의료원 외과중환자실장

경희대병원 응급의료센터장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정회원

 
저작권자 © 마이스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