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최초로 응급의학과 개설 등 응급의료 원년 멤버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마련과 기금 조성 위해 동분서주

임경수 서울아산병원 교수
임경수 서울아산병원 교수

 

  • 책 한 권으로 바뀐 인생

19895월 중순.

119 구조대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싣고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응급실로 급하게 들어왔다. 한쪽 다리는 완전히 잘려져 나갔고, 잘려져 나간 주인 잃은 다리는 피로 범벅이 된 채 구급대원이 따로 들고 있었다. 화물트럭이 8세 여자아이의 다리를 밟고 지나가 가느다란 다리가 두 동강으로 나가떨어졌다.

잘려져 나간 여아의 다리는 피를 계속 내뿜었다. 여아는 의식이 없었고, 맥박도 겨우 만져졌으며, 혈압은 측정되지도 않았다. 응급실장이자 외과전문의인 임경수 교수는 피를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혈관을 먼저 묶은 뒤 나머지 응급조치나 다른 부위도 검사할 생각이었다.

임경수는 다리에서 쏟아지는 피를 손으로 틀어막은 채 간호사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수술방으로 뛰어 올라가 지혈할 수 있는 바스큘라 클램프(vascular clamp·혈관 겸자)를 빨리 가져오세요.”

혈관 겸자는 응급실에 없고 수술방에만 있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지혈방법은 클램프로 동맥, 정맥을 따로 분류해 피가 안 나오게 막는 것이었다. 대퇴부의 동맥과 정맥을 다 묶어야 피가 멈춘다. 그리고 바로 수술방으로 옮겨야 생명을 건질 수 있다.

혈관 겸자가 오자 임경수는 빠른 손놀림으로 바로 혈관을 묶었다.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외상외과(traumatology)를 수련받았던 전문의로서 최상의 응급처치를 했다고 자부했다. 이렇게 빨리 조치를 했는데 환자가 살 수 있겠지.

그리고는 다른 응급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다른 병상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왔지만, 여아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했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숨을 놓은 것이다. 과다한 출혈로 인한 사망이었다.

아이가 10분만 일찍 왔어도……

임경수는 혼자 한숨을 내쉬었다.

최선을 다해 아쉬운 것은 없었지만 환자가 좀 더 빨리 오지 못해 숨을 거둔 것이 안타까웠다.

 

그로부터 1개월 후.

동료 교수가 외국학회에 참가했다가 귀국길에 책 한 권을 들고 임경수 방으로 찾아왔다. 외상외과를 전공한 임경수에게 맞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선물로 사 온 것이다. 외국의 전문서적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자신을 위해 일부러 책을 선물한 동료가 고마웠다.

‘ATLS(advanced trauma life support)’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미국의 응급의료진들이 반드시 받는 교육과정 중의 하나라는 사실도 알았다.

임경수는 무심코 초반부를 읽어내려가다, 어느 부분에 이르자 깜짝 놀랐다. 불과 얼마 전 여자환자를 치료하던 과정과 연관된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응급 외상환자가 왔을 때 의사가 해야 할 기본적인 조치를 적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외상환자가 왔을 때 가장 기본적인 과정인 ABC’s에 대해 적혀 있었다. 초기에 기도를 유지하고(A: airway keep), 호흡을 유지하면서(B: breathing support), 출혈을 치료해야(C: circulation support) 한다고 적혀 있지 않은가.

아뿔싸! 임경수는 무릎을 탁하고 쳤다. AB를 뛰어넘어 C만 시행했다는 오류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여아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먼저 기도와 호흡 유지를 하지 않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가장 기본적인 과정인 ABC’s를 준수하지 않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음을 알게 됐다. ATLS에 나온 방식대로 응급처치를 했다면, 어쩌면 여자아이는 살아 있었을지도 몰랐다.

피를 많이 흘리면 혈압이 떨어지고 자연스럽게 의식이 없어지면서 혀가 기도를 막아버린다. 이는 입안에서 숨 쉬는 공간을 줄어들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의식이 있으면 숨 쉬는 공간이 있어 호흡도 자연스럽지만, 의식이 없으면 숨쉬기가 쉽지 않다는 걸 모른 것이다. 과다출혈로 인한 사망이 아니라 기도가 막혀 숨진 것이란 결론이 내려졌다. 이러한 무지는 비단 임경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서울대병원과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외과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던 대한외상학회 임원진도 ATLS 사실 자체도 몰랐다.

응급실에 근무하면서 임경수는 국내의 외상사고 환자들의 대부분은 사고현장이나 이송 중 혹은 응급실에서 사망하고, 20~30%만 수술방까지 올라간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서울아산병원
서울아산병원

 

  • 개업의 꿈을 접다

임경수는 군의관을 마치면 곧바로 외과를 개업할 생각이었다. 그 계획을 적어도 스승에게는 미리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제대를 5개월 앞둔 198811, 휴가를 나와 외과 교수이자 고교·대학 선배인 강성준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님! 제대하면 바로 개업하려고 합니다.”

그래?”

강성준은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응급실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대학 동기인 이한식 강남세브란스병원(당시 영동세브란스병원) 교수와 친밀했고, 둘은 서로 응급실 운영에 관해 자주 이야기하던 사이였다. 이한식은 대한민국 최초로 1987년 강남세브란스병원에 응급의학과를 만든 응급의료 선구자였다.

강성준은 제자이자 후배인 임경수와 술을 한잔 기울이며 응급의학과에 대해 말했다.

야야,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난 뒤 개업하면 돈 많이 벌어!”

? 왜요?”

강성준은 응급실장인데다 이한식으로부터 앞으로 응급실이 중요하다는 걸 자주 듣다 보니, 제자이자 후배인 임경수를 보자마자 응급실 이야기부터 꺼냈다.

앞으로 응급실이 아주 중요해. 내과계 응급환자를 많이 보면 개업하는데 수익성이 더욱 클 수 있어!”

강성준은 응급실에서 심전도와 초음파를 하면 의료수가가 좋다는 걸 설명하며 1년만 원주세브란스병원 응급실을 맡아달라고 임경수에게 요청했다. 개업준비를 위한 경험 쌓기에 응급실 근무만큼 좋은 공간은 없다는 말에 임경수는 귀가 솔깃했다.

만약 내가 응급의학을 시작하면 이한식 교수님과 나 둘밖에 없군. 외과 의사 면허번호도 2,000번대이니까, 응급의학만 하면 이 분야에서는 1등이 될 수도 있겠군!“

임경수는 응급의학이 만만하게 보였고 경험이 쌓이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성준은 응급실 경력이 있으면 40세가 되어 10층 건물 살 것, 20층 건물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임경수에게 심어줬다. 임경수는 40대가 되면 건물주가 된 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인생을 즐겁게 살 꿈을 꾸고 있었다. 개업하면 응급실 근무경험을 바탕으로 외과 환자뿐 아니라 내과 환자, 고혈압·당뇨병 환자 등 각종 질병을 다 치료하게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내과계 응급환자를 많이 보면 개업하는데 수익성이 더욱 클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이다.

임경수는 그 자리에서 응급실을 맡겠다고 스승에게 말했다.

, 그러면 딱 1년만 해보겠습니다.“

임경수는 이렇게 응급의학을 시작했다.

19895월 강원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은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응급의학과를 개설하고 임경수가 응급실장으로 부임한다. 1년이라는 한시적인 기간을 정해놓은 채.

 

그러나 임경수의 결심은 채 몇 달을 가지 않았다. 자신의 무지로 미처 목숨을 건지지 못한 여아와 응급실의 열악한 환경을 경험한 그는 두 달이 지나지 않아 결심을 바꾼다. 응급의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응급의료센터를 개선하기 위한 업무에 전념하는 것이 의사로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개업을 포기하고, 응급센터의 운영을 포함해 응급의료체계를 개선하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소의치병, 중의치인, 대의치국(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이라는 슬로건을 마음속에 새겼다.

책 한 권이 임경수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놓은 것이다.

【1993년 일본으로 이한식 교수 초빙 (Dr. Ohwada)】 임경수가 일본에서 연수를 하던 중 이한식 교수(왼쪽에서 두번째)를 직접 일본으로 초빙해 일본의 응급의료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모임을 주선했다. 당시에도 모든 경비를 Dr. Ohwada(왼쪽에서 세번째)가 부담했다.
【1993년 일본으로 이한식 교수 초빙 (Dr. Ohwada)】 임경수가 일본에서 연수를 하던 중 이한식 교수(왼쪽에서 두번째)를 직접 일본으로 초빙해 일본의 응급의료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모임을 주선했다. 당시에도 모든 경비를 Dr. Ohwada(왼쪽에서 세번째)가 부담했다.

 

  • 응급의료 법률과 기금 마련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앞두고 올림픽위원회(IOC)가 한국의 응급의료체계 점검에 나섰지만, 응급의학이라는 학문도 없었고 응급의료체계도 갖춰지지 않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대회 기간 내에 벌어질지 모르는 응급환자에 대한 대처방안이 전혀 없어 정부도 고민이 많았다. 정부는 급한 대로 미국의 대형 구급차 5대를 긴급 수입해 잠실올림픽경기장과 가장 가까웠던 강남세브란스병원에 배치했다.

병원에서도 이에 대한 호응이 이어졌다. 강남세브란스병원은 응급의학과를 개설하고 외과 전문의 이한식 교수를 응급의학 과장으로 영입했다. 이한식은 병원 과장으로 있으면서 서울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의무부장으로 파견 나가 응급환자 발생에 대비했다.

비록 올림픽에서 큰 사고 없이 대회가 마무리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응급의학과의 필요성은 곳곳에서 제기됐다. 대학병원 응급실장을 중심으로 대한응급의학회 창립준비에 들어갔고 198912월 학회가 정식으로 창립한다. 그러나 학회만 만들어졌을 뿐이지, 응급의료 관련 법은 물론 제도, 예산, 인력 등 그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다.

초기에 응급의학에 뛰어들었던 사람 중 가장 젊은 사람은 임경수였다. 그는 응급의학 관련 법과 제도, 학과 개설, 전문의시험 등 많은 부분에 관여하며 응급의학회 발전에 앞장서야 할 나이가 제일 어린 실무자였다.

그는 보건복지부(당시 보건사회부) 지역의료과와 법령부터 만드는 실무작업에 투입됐다. 지역의료과장이었던 박윤형 사무관(경희의대 졸업), 이한식 교수, 임경수, 이렇게 3명이 1990년부터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초안을 만들기 위해 1년 동안 서울 정릉과 과천 등에서 합숙하며 매주 3~4, 길게는 일주일씩 초안 마련을 위한 기초작업을 벌였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초안과 시행령 마련을 위한 준비작업 결과는 19941월 마침내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지면서 빛을 봤다.

법이 만들어졌지만, 응급의학이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전문의제도 마련도 시급한 과제였다. 대한응급의학회는 1993년부터 응급의학과를 전문과로 인정해달라고 대한의학회에 신청했지만, 의학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응급실에서 인턴으로도 처치가 가능하다는 이유를 대며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나 당시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사고가 잇따르면서 복지부는 대한의학회에 압박을 가해 응급의학과를 전문과로 인정하라고 매일 독촉했다. 인정하지 않으면 각 임상과의 전공의 정원을 줄이겠다는 엄포도 놓았다. 지역의료과장으로 있던 박윤형이 각 임상과 전공의 T/O를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윤형은 의학회에 응급의학을 인정하지 않으면 전문의 T/O를 줄이겠다고 압박했다. 이 같은 압박과 대한응급의학회의 끊임없는 요구가 결국 받아들여져 19958월 대한의학회는 응급의학과를 전문과로 인정하고, 19961월부터 응급의학과 전문의시험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한다.

임경수는 2001년부터는 응급의료기금 만드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인천 길병원 이근 교수와 함께 국회를 찾아가 기금 마련을 호소하는 한편 각 지역 응급의료센터장에게 국회의원 을 설득할 것을 요구하는 투트랙 전략을 병행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2003년 응급의료기금이 이전보다 20배 이상 뛴 400억 원으로 확충됐다. 응급환자 치료를 제대로 하라는 차원에서 기금이 많이 늘어난 것이다. 그때부터 현장에서 응급의료가 더 활발하게 돌아갔다. 2010년에는 매년 2,000억 원 규모로 기금이 대폭 확충되면서 응급의료가 속도를 내며 발전해갔다.

임경수는 응급의료 관련 휴먼웨어,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구축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응급의학 전문의였다.

【1989년 정부간행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한 후 보건복지부(당시 보건사회부) 지역의료과(과장 오대규)에서는 국내 응급의료의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1989년 국내 최초로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정부간행물이 발간된다. 이후 지역의료과 박윤형 과장은 임경수, 이한식 교수와 함께 응급실 운영지침을 작성해 전국의 응급실에 배포하기 시작한다.
【1989년 정부간행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한 후 보건복지부(당시 보건사회부) 지역의료과(과장 오대규)에서는 국내 응급의료의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1989년 국내 최초로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정부간행물이 발간된다. 이후 지역의료과 박윤형 과장은 임경수, 이한식 교수와 함께 응급실 운영지침을 작성해 전국의 응급실에 배포하기 시작한다.

 

  • 응급의학 분야별 전문성 강화

 

강남세브란스병원은 19893월 응급의학과 전공의를 모집하며 본격적인 전문의 수련에 들어갔다. 19895월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에 응급의학과가 개설되면서 응급의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움직임을 보였다.

1989년 초 응급의학과가 개설된 곳은 강남세브란스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원주세브란스병원 등 3곳에 불과했지만, 확산속도는 빨랐다. 응급의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문인력 양성이 우선 과제였다. 전문의를 하루빨리 배출해야만 학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이를 간파한 이한식은 임경수에게도 응급의학과 전공의를 모집할 것을 권유하며 전국적으로 응급의학 붐을 조성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임경수의 생각은 달랐다. 전공의를 빨리 모집하는 것도 좋지만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토대 마련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전공의 모집보다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교수모집이 우선이라고 봤다. 응급의학 전공의가 전문응급처치(전문외상처치술, 전문심장처치술, 소아전문처치술)와 각종 응급진단에도 숙달되려면 훌륭한 교수 밑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전문심장처치술(ACLS : advanced cardiac life support)을 할 수 있는 심장내과(cardiology) 전문의를 초빙할 때까지 전공의를 뽑을 수 없다며 전공의 선발을 미뤘다. 자신이 외과 인만큼 내과 전문의가 있어야 응급의학과가 구색을 맞추며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임경수는 심장내과 교수에게 응급실에서 근무할 심장내과 전문의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고, 1990년 겨울 황성오 교수를 추천받는다. 19913월 황 교수를 응급의학과에 합류시키면서 비로소 응급의학과 전공의를 선발한다. 그해 전국 최초로 원주세브란스 의과대학에 응급의학교실도 들어섰다.

임경수는 황성오가 합류하면서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둘은 서로 호흡도 잘 맞았다. 외과, 내과 분야로 나눠 응급의학 전문성 강화에 나섰다. 임경수는 응급의료체계와 외상처치에 대한 전공의 수련을 전담하고, 황성오는 심장내과를 비롯해 내과 질환에 대한 교육을 전담했다. 응급영상의학 분야에서 황성오는 심초음파를 주로 가르치고, 임경수는 복부초음파를 가르쳤다. 황성오는 중환자 의학 등으로 영역을 넓혀 전공의를 교육하고, 임경수는 재난의학과 중독학으로 영역을 넓혀나갔다. 응급실 전용CT와 전용초음파 등을 전국 처음으로 응급실에 들이며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배경도 되었다.

둘은 친형제보다도 더 가까울 정도로 의기투합되어 분야별로 전문성을 나눠 논문과 응급의학 관련 서적을 다양하게 집필하며 응급의학과 확산에 도화선이 되었다. 외상, 재난, 독극물, 스포츠응급의학, 응급구조학 등 분야별 전문성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호흡이 척척 맞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임경수가 19967월 서울아산병원 응급의학과 개설 요청을 받고 떠나면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우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산병원으로 옮긴 임경수는 19972월 응급의학과를 정식으로 개설하며 전공의를 모집해 수련을 시작한다.

그러나 새롭게 둥지를 튼 서울아산병원에서 응급의학을 정착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산병원에는 서울대학교 출신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임경수는 다른 임상과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응급의학과가 정상화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응급진료 영역이 자체적으로 확보되지 않으면 응급의학과를 신청하는 전공의가 없을 것은 뻔했다. 이를 해결하고 응급의학과 전공의에게 양질의 교육과정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교수진의 전문화가 절실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dual board system’이었다. 응급의학과 교수가 되려면 최소한 2개 이상의 전문의를 받았거나 그의 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대형병원에서 응급의학이 살아남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응급의학과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의라도 다시 응급의학과 전공의 과정을 이수하도록 만들었다.

실제 이러한 전략은 잘 먹혀들었다. 심장내과 전문의 1, 소화기내과 전문의 1, 소아과 전문의 2명이 다시 응급의학과 전공의 과정을 밟게 되었고,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한 후 교수로 채용됐다. 또 응급의학과 전문의만 취득한 경우에는 중환자 의학이나 타 임상 분야 인정의 과정을 이수해야만 교수로 임용했다. 응급의학과 내에서 해당 영역의 교수진이 없으면 전공의를 2개월 정도 파견 보내 응급의료의 전문성을 학습 받게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응급의학과 전공의들의 영역이 점점 넓어졌다. 현재는 아산병원에서 응급의학과와 타 임상과와 마찰이 거의 없어졌으며, 최상의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상호 존중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1991년 일본구급학회장 Dr. Ohwada 한국 방문】 임경수는 일본의 응급의료체계를 공부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일본 Kitasato대학병원 응급센터 소장인 Dr. Ohwada(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와 접촉하게 되고, 1991년 한국으로 초빙해 국내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조언을 직접 듣게된다. 뒤쪽 가운 입은 의사가 원주의대 응급의학과 1호 전공의인 안무업 선생(現 춘천한림대 응급의학과 교수)이다.
【1991년 일본구급학회장 Dr. Ohwada 한국 방문】 임경수는 일본의 응급의료체계를 공부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일본 Kitasato대학병원 응급센터 소장인 Dr. Ohwada(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와 접촉하게 되고, 1991년 한국으로 초빙해 국내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조언을 직접 듣게된다. 뒤쪽 가운 입은 의사가 원주의대 응급의학과 1호 전공의인 안무업 선생(現 춘천한림대 응급의학과 교수)이다.

 

  • 한국형 응급의료체계 구축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해 정부가 급하게 도입한 미국형 구급차는 너무 커 국내의 좁은 골목길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굽은 도로도 많아 이송 중인 환자들이 구토하는 일이 빈번했다. 미국형 구급차는 한국 응급의료시스템과는 맞지 않았다.

당시 대한민국의 응급의료는 미국과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것이 많았다. 의료는 미국의 제도를, 의료수가 등은 일본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응급의료를 공부하는 사람도 혼란스러웠다. 선진 외국의 응급의료체계를 도입했지만, 짜깁기한듯해 우리나라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식의 응급의료체계 구축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임경수는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응급의료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1990년도부터 미국을 비롯해 유럽 등을 다니며 응급의료체계 구상에 들어갔다. 그는 미국형 응급의료체계를 무조건 국내에 도입하는 것보다 한국형 응급의료체계를 구축하고 싶었다.

임경수는 여러 외국 논문을 읽던 중 미국보다는 유럽의 응급의료체계(영국의 NHS, 프랑스의 SAMU)가 인상적이었고, 일본의 구급체계(救急 system)에 흥미가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응급의료에 관한 논문자료들은 매우 많아 직접 체류하면서 파악해도 충분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관한 자료는 일부분의 논문이 전부였다. 임경수는 일본 응급의료체계를 자세히 알고 싶어 일본 응급의학의 창시자이자 대가로 알려져 있던 기타사토(Kitasato) 대학병원 응급센터소장 Dr. Ohwada(大和田)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 소속되어 있는 병원은 가나카와현에 있는 사립병원으로 구급센터 운영에서는 일본 최고 수준이었다.

임경수는 Ohwada를 통해 일본 응급의학시스템 구축과정을 듣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Ohwada 교수님.

저는 대한민국 원주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로 있는 임경수입니다.

교수님이 쓰신 일본 응급의료체계에 관한 논문을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응급의료체계구축과정 단계를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응급의료시스템의 특징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인터뷰할 시간을 내주시면 방문해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도 답장은 없었다. 임경수의 일본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갔지만, 연이은 편지에도 전혀 답장이 오지 않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은근히 오기도 생겼다. 6번째 편지를 보냈다. 그때야 반응했다. 그 편지를 받고 더 이상 거절하기가 어려웠는지 10개월 만에 짧지만, 극적인 회신을 받았다.

 

한달 후 일본에 오면 30분 정도 만나주겠습니다.

 

임경수는 마지못해 답장을 받은 느낌이었지만 그나마 일본 응급의료체계를 만든 창시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설렜다.

19906, 30분간의 짧은 만남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임경수는 Ohwada 교수를 만나 차를 마시며 이것저것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30분의 짧은 만남으로 그 많던 궁금증은 해소될 수 없었다.

Ohwada도 단 30분을 만나기 위해 멀리 한국에서 온 젊은 의사가 미안했는지 전문의를 불러 응급센터를 구석구석 자세히 알려주라고 지시했을 뿐 별다른 성의가 없었다. 그러면서 한국에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데, 혹시 방문기회가 되면 한국의 실정을 직접 보고 조언하고 싶다는 말을 남긴 것이 전부였다.

임경수는 Ohwada의 제안은 빈말로 들렸고, 오히려 강원도 원주에서 일본까지 찾아갔는데도 저녁식사 한 끼 하자는 말도 하지 않은 일본 교수가 내내 못마땅하고 섭섭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는 일본에 발붙이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 시간이 흘러도 일본의 응급의료체계가 완성되기까지의 세부과정에 대한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일본에서 무시당한 듯한 대접을 받았던 걸 생각하면 다시는 Ohwada를 만나지 않아야 했지만, 이듬해 그를 한국으로 초대하고 만다. 오기나 자존심보다 응급의료체계 구축이 우선이었다.

임경수는 자료를 철저하게 준비해 Ohwada에게 준 뒤 공항에서부터 한국의 응급의료센터, 소방서, 보건복지부 등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이 푸대접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를 극진히 모셨다. 이러한 정성이 통했는지 Ohwada는 귀국 전날 밤 임경수에게 해외연수 계획을 물었다.

임 교수님. 해외연수 계획은 있나요?”

, 저는 미국으로 가고 싶습니다.”

미국에 연수를 가면 ‘yellow monkey’ 대접받아요.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답니다.”

, 그래요?”

미국에서 겉돌지 말고, 일본에 연수를 온다면 제가 ‘full support’를 하겠습니다.”

Ohwada는 임경수의 철저한 준비성과 포기하지 않는 열정 등을 높이 사 그에게 일본 연수를 제안한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제안을 받은 임경수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선의로 간주했다. 몇 개월 뒤 임경수는 일본 연수를 결정하고 19963, 1년의 일정으로 일본으로 향한다.

일본에서 Ohwada의 지원은 헌신적이었다. 경제적인 지원은 물론 응급센터에서 배우고 싶은 학문과 술기를 도와주도록 교수진 4(외상외과, 정형외과, 영상의학과, 중환자의학)을 배정하며 다양한 술기를 익힐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각종 응급처치, 응급수술, 중환자 처치, 영상시술 등에도 직접 참여했다. 한국형 응급의료체계 구축하는데 필요한 응급의학 전문의 양성, 응급구조사 교육 등 인력을 어떻게 배치하고 교육할 것인가, 또 의료수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도 모두 배울 수 있었다.

일본 연수의 소중하고 다양한 경험에 힘입어 임경수는 일본 응급의료체계의 단점을 보완하면 한국형 응급의료를 손쉽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2003년 개발된 응급실 EMR (의사진료용)】 임경수는 1996년 서울아산병원으로 근무지를 변경한 후 일단 전산으로 처방을 내리는 OCS(order communication system)를 응급실에 적용시킨다. 당시 외래에서도 OCS가 일부만 적용되는 시기였고 병원경영진은 OCS 성공 가능성을 낮게 생각했다. 응급실 간호사들도 얼마나 바쁜데 OCS까지 해야 하냐며, 적극 반대했다. 2-3개월의 간호사 설득을 통해 응급실에 OCS를 정착시켰다. 이후 임경수가 직접 전산프로그래머 5명을 대동해 EMR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2년간의 노력 끝에 2003년 응급실에서 EMR을 100% 활용했다.
【2003년 개발된 응급실 EMR (의사진료용)】 임경수는 1996년 서울아산병원으로 근무지를 변경한 후 일단 전산으로 처방을 내리는 OCS(order communication system)를 응급실에 적용시킨다. 당시 외래에서도 OCS가 일부만 적용되는 시기였고 병원경영진은 OCS 성공 가능성을 낮게 생각했다. 응급실 간호사들도 얼마나 바쁜데 OCS까지 해야 하냐며, 적극 반대했다. 2-3개월의 간호사 설득을 통해 응급실에 OCS를 정착시켰다. 이후 임경수가 직접 전산프로그래머 5명을 대동해 EMR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2년간의 노력 끝에 2003년 응급실에서 EMR을 100% 활용했다.

 

  • 응급의료 전산화에 앞장

 

임경수가 서울아산병원 영입 제의를 받았을 때 그의 전산에 대한 인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1995년 원장단 면접 시 민병철 원장이 임경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현재의 응급실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전산화가 가장 필요합니다.”

임경수는 곧바로 대답하며 응급실에서 EMR(electronic medical record)을 활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리 준비한 A4 한 장으로 정리된 전산화의 장점 및 활용방안 등에 대한 자료도 내밀었다.

서울아산병원은 OCS(order communication system)를 외래진료 일부분에서 2년째 시범 적용하고 있었다. 원장은 응급실이 넘쳐나는 환자로 항상 가득 차 전문인력과 공간 마련이 우선이라고 임경수가 대답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을 들어 당황했다.

원장은 되물었다.

전산화가 가장 시급하다는 말, 그거 진심이나요?”

.”

전문 전산업체에서 OCS를 시범 적용하며 개발하고 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응급실에 EMR을 활용하자고 대답했으니. 전산업체에서도 EMR을 개발하지 못해 포기했는데 응급실에서 하자고 했으니 원장단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 응급실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벅찰텐데 EMR을 개발해 활용하자고

그러나 임경수의 생각은 실제 그대로 구현되었다.

199691일 부임한 이후 가장 먼저 시작한 게 OCS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임경수가 서울아산병원으로 발령받아 응급실에 근무했을 때 60여 명 정도의 응급환자가 머물고 있었지만 환자차트는 10여 곳에 분산되어 있어 이를 찾는데 20분 정도가 소요될 정도였다.

18개월 만에 응급실 OCS를 정착시켰고, 곧바로 아산병원 최초로 응급실에서 EMR을 개발하기 시작해 2년 후 가동했다. 응급실에서 개발된 EMR을 기초로 해 서울아산병원의 외래와 입원용 EMR이 추가 개발됐다.

간호사들이 전공의 호출시각과 응급실 도착시각을 일일이 기재하는 게 너무 비효율적이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2007년부터 응급의료센터에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시스템도 가동했다. 응급진료를 신속히 진행하기 위해 각과 전공의를 호출한 시각과 응급실 도착시각 등을 차트에 기재해 각 전공의들의 신속한 응급진료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전산으로 전공의를 호출하고 호출시각을 자동 기재하도록 했고, 전공의 명찰에 RFID를 심어 응급실 입구에 도착하면 자동으로 도착시각이 기록되도록 시스템화했다, 이후 각 임상과별, 의사별 도착시각을 매달 임상과장에게 통보해 신속한 응급진료를 유도할 수 있었다. 전산화가 됨으로써 업무의 효율성이 크게 높아졌다.

모범이 된 서울아산병원의 응급의료 전산시스템은 정부를 비롯한 각 응급의료센터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고, 정부의 응급의료기관 평가에도 적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임경수가 이처럼 전산에 관심을 가졌던 건 그의 악필(惡筆) 때문이었다. 글씨체가 좋지 않은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1983년 외과 전공의 2년 차 시절, 수술 전 당뇨 환자의 처방을 기재하는 과정에서 ‘insulin 10 units’라고 적은 걸 간호사가 10cc로 잘못 읽어 과량의 인슐린을 주사했고 환자는 중태에 빠졌다. 벌칙으로 회진 시 한 달 동안 타자기를 직접 들고 다니면서 모든 처방을 타자기로 적는 수모를 겪었다.

전공의 3년 차 때에는 원고지 수십 장에 빼곡히 논문을 적어 지도교수에게 제출했는데, 2~3장 읽은 교수가 글씨를 도저히 못 알아보겠다면서 원고지를 모두 찢어버렸다. 찢어진 원고지를 다시 모아 조각을 맞추면서 다른 원고로 내용을 옮겨 적었던 때의 창피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였다.

악필 덕분에 KAIST에 다니던 동생 덕분에 컴퓨터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악필로 더 이상 수모를 당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했다.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3년은 전산프로그램을 독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산을 의료에 접목하면 편리한 것은 물론 일이 효율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고 전산체계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 노력은 이후 진가를 발휘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OCS, EMR, RFID 등의 전산프로그램 개발에 직접 참여하면서 의료전산화 확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임경수 교수
임경수 교수

 

  • 스포츠 응급의학 개척

 

임경수는 30대 초반부터 응급의학, 외상학, 재난의학, 응급영상학, 소아응급 등 응급의료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직접 참여했다. 40대에는 중독학(toxicology)까지 영역을 넓혀 연구해 서울아산병원 응급센터를 독극물전문센터로 승인받았다.

다만, 스포츠 응급의학(sports emergency) 분야는 접근이 어려웠다. 스포츠 응급의학은 국내에서는 생소하지만, 미국에서는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처음 가는 길은 누구도 하지 않으려 했다. 초창기 응급의학에 뛰어든 임경수는 스포츠 응급의학 분야도 아산병원에 오면서부터 알게 됐다. 병원 스포츠의학센터의 소장 진영수 교수의 스포츠 손상 환자들의 응급진료로 자주 만나면서 1996년 대한스포츠의학회 임원으로 임명되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임경수는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 대한외상학회 회장, 국제재난학회 회장(APCDM) 등 역할이 이어지면서 대한스포츠의학회에서의 학술 활동을 잠시 접게 된다. 이후 스포츠 응급의학 영역은 더 이상 응급의학에서 다룰 영역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후배들도 이 분야 연구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으로 취임한 2006년부터 10년간 스포츠의학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2016년 대한체육회 회장이자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위원인 이기흥 회장과 인연으로 대한체육회 의무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스포츠의학에 관한 열정이 되살아났다. 스포츠의학 분야에서 주축을 이루는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스포츠의학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돼 응급의학과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994년 한국형 구급차 성능시험 (인요한 교수)】 연세의대 가정의학과 인요한 교수가 한국형 구급차를 직접 개발했는데, 개발중인 구급차를 원주로 가져와서 각종 응급처치의 성공률을 연구했다. 인요한 교수의 아버지가 전남 순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전남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인 교수는 구급차 개발에 전념하게 된다.
【1994년 한국형 구급차 성능시험 (인요한 교수)】 연세의대 가정의학과 인요한 교수가 한국형 구급차를 직접 개발했는데, 개발중인 구급차를 원주로 가져와서 각종 응급처치의 성공률을 연구했다. 인요한 교수의 아버지가 전남 순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전남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인 교수는 구급차 개발에 전념하게 된다.

 

  • 독성학 연구

 

1990년대 임경수가 강원도 원주에서 응급실을 운영할 때에 독초를 먹고 실려 온 환자들이 많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전문서적도 없었고 외국 서적에 나온 독초는 우리나라에서 자라지도 않아 전문처치를 할 방법이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은 우리나라 모든 병원이 똑같았다. 임경수는 언젠가 독초에 관한 연구를 하리라고 마음은 먹었지만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 밀려드는 응급환자를 치료하는 것만도 벅찼다.

2008년 건강검진에서 우연히 경계성 위암이 발견된 임경수에게 그 충격이란 말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멋진 동료와 환자 옆에서 지냈던 순간이 가장 행복했지만, 그 외 업무로 받았던 정신적 스트레스는 어떻게 보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세월을 돌이키지는 못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독초에 관한 연구를 죽기 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국내에서 출판된 식물 관련 서적을 정리해 독초 340여 종을 선정했지만 사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책에 낼 사진을 구매하려면 비용이 상상 이상으로 들어간다는 걸 알고 직접 독초 촬영에 나섰다. 하지만 이마저도 어려웠다. 사진 촬영 방법도 잘 모를뿐더러 3,000여 종의 식물들을 일일이 감별하고 촬영하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사진 촬영술도 독학으로 익히며 독초를 찾아 촬영하는 과정에 의학전문 기자이자 생물학을 전공한 김원학을 우연히 만나 식물에 대한 도움을 많이 받는 행운이 찾아왔다. 임경수는 전국의 독초를 찾아 매년 산과 들, 해안가를 거닐었다. 독초 복용 환자 진료에 도움이 되고자 했던 구상이 김원학을 만나면서 점점 확대돼 독초에 관한 에피소드나 역사까지 곁들여 독초와 관련된 책을 발간했다. 독초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독성과 관련된 독버섯 전문가, 농약 전문가들을 만나 정리한 서적도 더불어 출간했다. 독초와 약초를 감별하려면 모든 식물을 파악해야 하기에 나중에는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 유입된 식물까지 촬영하고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임경수는 독초를 찍다가 발견한 야생화의 매혹에 빠지면서 이제는 죽을 때까지 야생화를 촬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지금도 시간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산과 바다, 들로 나선다. 내년 2월 정년퇴임을 하면 전국 도시와 농촌에 일정 기간 거주하면서 야생화를 찍으며 나머지 인생을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품고 있다.

【1995년 영국 견학 1994년부터 1995년까지 국내에서 대형 재난사고가 빈발하면서 보건사회부는 재난장비의 구매를 위해 영국정부와 접촉하게 된다. 당시 모든 영국정부의 초청으로 보사부 박윤형 과장과 직원들이 참가하고, 의사로는 이근 교수(가천대 길병원), 정관호(서울아산병원 외상외과), 인요한(연세대 가정의학과), 김윤(서울대 의료관리학과) 등이 동행한다. 정관호 선생은 미국에서 외상외과 전문의(trauma surgeon)으로 활동하던 중 서울아산병원으로 초빙되어 활동하게 되며, 임경수가 응급실장으로 있을 때 응급부실장을 맡고 있었다.
【1995년 영국 견학】 1994년부터 1995년까지 국내에서 대형 재난사고가 빈발하면서 보건사회부는 재난장비의 구매를 위해 영국정부와 접촉하게 된다. 당시 모든 영국정부의 초청으로 보사부 박윤형 과장과 직원들이 참가하고, 의사로는 이근 교수(가천대 길병원), 정관호(서울아산병원 외상외과), 인요한(연세대 가정의학과), 김윤(서울대 의료관리학과) 등이 동행한다. 정관호 선생은 미국에서 외상외과 전문의(trauma surgeon)으로 활동하던 중 서울아산병원으로 초빙되어 활동하게 되며, 임경수가 응급실장으로 있을 때 응급부실장을 맡고 있었다.

 

임경수 교수 프로필

 

학력

연세대 의대 졸업

한양대 의학 석사

고려대 의학 박사

 

경력사항

연세대 원주의대부속 원주기독병원 인턴ㆍ레지던트

원주의대부속 원주기독병원 일반외과 전공의

연세대 원주의대부속 원주기독병원 응급의학과장

울산대 의대 응급의학교실 교수

서울아산병원 응급의학과장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

대한외상학회 회장

국제재난학회 회장

대한체육회 의무위원회 위원장

재단법인 양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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