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최초 응급의학과 개설 등 응급의료 개척 선구자
응급의료분쟁 도서 등 발간해 후배에 길라잡이 역할

 

영남 최초로 영남대병원에 응급의학과 개설

 

19932월 초 영남대병원. 도병수는 이달 말이면 이곳에서 외과 전문의를 취득한다. 서전(surgeon)으로서 대학교수로 가 제자들을 가르칠 것인지, 아니면 수술의 대가가 되어 한 분야 최고 전문가가 될 것인지, 머릿속으로 미래를 그리며 차근차근 구체적인 과정을 밟아나갈 예정이었다.

의과대학 6년과 인턴 1, 레지던트 4년 그 험난했던 11년의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어 다행이었고,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밝디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린 자신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잘 견뎌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이렇게 희망에 부풀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스승이었던 권굉보 외과 주임교수가 도병수를 불렀다.

우리 병원에 응급의학과를 만들어 응급실을 더 체계적으로 운영할 예정인데 네가 한 번 맡아서 해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스승의 말은 부탁이었지만, 당시에는 절대적인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병수는 응급의학이라는 단어를 이날 스승에게 처음 들었다. 인턴 때 응급실에서 응급환자가 오면 선배나 교수들에게 연락해 신속하게 조치를 할 수 있도록 연락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응급의학과를 만드는 것은 물론 운영까지 해보라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경제가 고도성장하면서 교통사고가 크게 늘었고, 산업현장의 활성화로 크고 작은 각종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사회적 분위기로 봤을 때 응급의료는 전 국민의 관심을 끌었고, 정부도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로 여겼다.

영남대병원도 마찬가지였다. 응급의학과를 만들 계획을 세운 뒤 적합한 인물 물색은 권 교수의 몫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로 도병수를 선택한 것이다.

권 교수는 미국에서 트라우마와 관련한 치료를 하면서 이 분야에서는 최고 전문의였다. 그에게 응급의학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학문이라고 생각하며 병원에 학과 개설의 필요성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도병수는 외과 이외의 과에 대해서는 전문성이 아예 없었다. 응급의학과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학문이라 기본적인 개념이나 지식도 부족했다.

당시 응급실은 인턴 등이 대기하면서 각 과에 연락해 그 분야 레지던트나 전문의가 내려와 진료하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응급의학과는 인턴이 응급환자가 왔을 때 소생술을 시행하고 전문과와 연결해주는 완충 지대의 역할을 맡았다.

도병수는 이 일을 꼭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과연 내가 응급실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나 당시 스승의 명령은 의과대학에서는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도병수는 영동세브란스병원(현 강남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이한식 교수를 찾아가 응급의학에 대한 개념 정도를 알고 싶었다. 이한식은 19873월 대한민국 최초로 응급의학과를 개설한 우리나라 응급의학과 개척자였다.

19932월 도병수는 영남대병원 응급의학과로 발령을 받자마자 곧바로 영동세브란스병원 근처에 모텔부터 얻었다. 응급의학과가 무엇이고, 무슨 역할을 하며, 어떻게 환자를 치료하며, 관련 교과서는 무엇인지 등을 하나씩 세밀하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어떻게든 응급의학과 개설 전에 대략의 공부를 마치고 싶었다.

도병수는 이한식에게 궁금한 부분을 물었다.

교수님! 응급의학이 도대체 뭡니꺼?, 무슨 책으로 공부해야 합니꺼?”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영동세브란스병원에는 당시 레지던트 4년 차까지 있을 정도로 틀이 갖추어져 있었고 정식 응급의학 전문의 제도가 생겨나기 전이라서 그렇지 다른 임상과와 비슷하게 나름대로 체계는 잡혀 있었다.

도병수는 매일 새벽 응급실로 출근해 옵서버(참관인)처럼 참관하며 치료 방법과 수련 과정 등 응급의료시스템 전반에 대해 배워나갔다. 일주일 동안 부지런히 익혔다. 하지만 곧바로 영남대병원에 응급의학과를 개설해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서울에 머무를 수는 없었고 하루빨리 돌아가 개설준비를 마쳐야 했다.

일주일간의 참관은 한계가 있었다. 응급의학이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개념은 잡을 수 있었지만, 향후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일주일간의 참관을 마친 뒤 도병수는 이한식을 찾아갔다.

교수님, 많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한식도 응급의학이라는 학문을 영남에서 홀로 새롭게 개척하려는 도병수가 한편으론 안타까웠지만, 잘 되기만을 바랐다.

도 선생! 한번 열심히 해보세요.”

,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런데 잘해봐야 본전입니다.”

?”

뭔가 문제점이 있으면 위에 있는 분들에게 바로 이야기를 하세요. 그래야 응급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압니다.”

이한식은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깊은 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응급실은 항상 일이 터지는 곳이니까 한쪽이 열심히 해도 다른 한쪽이 터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지만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위에 알려야 한다는 것을 도병수에게 팁으로 알려줬다. 혼자서 개척하는 만큼 힘이 들어 속으로 끙끙 앓지 말고 어려움을 이야기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응급의료의 애로점이 있으면 위에 이야기해야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의미였다. 외과에서 공부했지만, 응급의학에서는 이한식이 도병수의 최초 스승이었다.

도병수는 19933월 영남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영남대병원에 응급의학과를 만들었다.

 

응급구조사 제도 마련에 큰 획

 

1980년대 말 대한민국에서는 병원의 야간진료 거부, 응급환자 거부로 환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속출했다. 응급실의 기능이 사실상 별로 없는 상태에서 응급환자가 오면 상당수가 제때 치료받지 못해 사망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응급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들은 응급환자가 오면 어느 정도 대처 방법을 알고 있지만, 현장에서 환자를 가장 먼저 접하는 응급구조사들은 초기처치 방법을 알고 있지 않았다. 부목도 제대로 대지 않고 붕대도 아무렇게나 칭칭 감아대기 일쑤였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외상처치가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다. 부목은 깁스와 함께 비관혈적(非觀血的) 고정법의 대표적인 방법인데도 소홀하게 다뤄 환자 예후를 나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심지어 환자의 생명을 곧바로 결정하는 심폐소생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환자들이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했다. 이와 관련한 교육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처럼 응급구조사들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동안 이 분야를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급실은 의사, 간호사 모두의 기피 부서였다. 병원 경영진도 응급실은 경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필요악의 시설이라고 생각하며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응급실 근무를 하지 않으려 하는데 응급환자를 처음 다루는 응급구조사들도 있을 리 없었고 설사 있어도 제대로 된 구급 교육은 관심사도 아니었다. 그저 병원에 환자를 빨리 옮기는 일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환자의 후유증을 일차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안 중 하나였다. 도병수는 현장응급처치 요원인 응급구조사를 제대로 교육하는 것이 응급처치의 초기라고 생각했다. 응급의료체계 구축은 병원 전 처치가 제때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시작한다고 여겼다.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잘하면 환자의 후유증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응급구조사는 병원 전 가장 중요한 처치 요원이다.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응급처치를 신속히 해서 이송하면 훨씬 수월하게 치료할 수 있고 환자 예후도 좋았다.

도병수를 비롯한 응급의학 1세대는 응급구조사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하기로 하고 응급구조사를 대상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구급 교육을 했다. 이 교육에는 이한식 교수와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임경수·황성오 교수, 전남대병원 민용일 교수, 전북대병원 이재백 교수 등 응급의학 초창기 멤버가 참여했다.

구급과 관련해 바뀐 부분은 업데이트해서 가르쳤고 잘못되어 있으면 수정해 알려줬다.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으로 구급 수준은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환자들의 후유증도 줄어들었다. 응급의료체계의 일정 부분을 담당하는 병원 전 처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한 축을 맡아 응급구조사를 교육한 것이다.

응급구조사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과정에 수많은 대형사고가 잇따랐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죽는 대형참사가 하루가 멀다시피 연이어 터져나오면서 응급구조에 대한 사회적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됐다. 1993년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사고 및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참사·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고·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 등 대형사고 구급·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응급의료체계 전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시작됐다.

보건사회부는 응급구조사 직종을 신설해 병원 응급실, 구급차 탑승 인력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1995년에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을 신설하며 응급구조사 제도를 만들었다.

도병수를 비롯한 응급의학 1세대의 작은 날갯짓이 응급의료의 더 큰 도약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병수 교수는 응급구조사에 대한 교육 실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할 때 감회가 새롭다.

응급실로 구급대원이 환자를 이송해오면 예전의 1994~95년하고 지금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은 세련되고 아주 잘 합니다. 붕대 하나를 감아와도 잘 감아오고, 부목도 잘해옵니다. 부목의 중요성을 많이 깨달은 것 같습니다. 부목을 제대로 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많은 차이가 있죠. 부목을 잘 대면 빨리 치료되고 후유증이 없습니다. 반면 옳게 안 되면 치료 기간이 더 걸리고 감염이 쉽게 되죠. 나중에 후유증이 더 생길 수 있습니다. ”

 

지역 내 응급의학 모임체 창립 주도

 

- 대구·경북 지역 응급의료인협의회 조직

 

19945월 계명대 동산의료원 응급의학과가 개설되면서 초대과장 및 주임교수로 이동필 교수가 부임했다. 그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응급실에서 근무하며 응급의학의 수련 연구 및 환자 진료에 종사한 응급의료의 산증인이었다. 국내에는 응급의학과가 생소했지만, 미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응급의학을 전문 분야로 인정하고 있었고 이동필은 이곳에서 직접 응급의료에 관한 다양한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이제 응급의학과 개설이 1년밖에 되지 않은 도병수에게 이동필은 천군만마와 같은 구세군이었다. 이동필에게 응급의료의 본산지인 미국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것도 좋은 기회였다. 도병수는 이동필과 함께 영남 지역 응급의료 발전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이제 막 신생과에 불과한 응급의학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엘리트 몇 명으로 이끄는 건 한계가 있었다.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했다. 이들과 함께 응급의료의 조직을 이끌고 나아가야 좀 더 쉽게 굴러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응급의료 현장에서 일하는 의사, 간호사, 응급구조사 등 모두를 망라한 조직을 구성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성장하기를 바랐다.

199410, 도병수는 이동필과 함께 대구·경북 지역 응급의료인협의회를 조직해 영남 지역 응급의료 확산의 서막을 알렸다. 대구·경북 지역 응급의학과 의사를 비롯해 응급구조 교육을 받던 응급구조사, 간호사 등을 모두 끌어모았다. 매일 응급실에서 만나기 때문에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교육과 친목을 통해 응급의료의 발전을 꾀하자는 취지였다. 응급의학 의사들과 응급구조사, 간호사 등 응급의료 종사자들이 누군지 알고 응급의료인끼리 서로 협력하기 위한 일종의 네트워크였다.

도병수는 미국 펜실바니아 주립대학병원의 Dr. HollimanDr. Gautam 교수를 초빙해 그곳의 응급의료의 현실을 생생하게 들었다. 처음에는 몇 명만의 소수로 참여한 모임이었지만 한해가 지나지 않아 회원 수가 40~50명으로 늘어났다. 이로 인해 환자에 대한 의료서비스의 질은 높아질 수 있었다.

이런 활성화와 정부 차원의 응급의료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응급의료인들의 조직은 점점 커져갔다. 경북대병원과 대구가톨릭대병원, 계명대병원, 대구파티마병원 등에서 응급의학과가 생겨났다. 대학에도 응급구조학과가 생겨나면서 교수들의 수도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분화하는 게 좋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후 대한응급의학회는 대구·경북 지회를 만들었으며, 응급구조사들은 대한응급구조사협회를 구성해 따로 모임을 가지면서 발전적인 해체가 이루어졌다.

 

- 삼남응급의학회 창립 때 영남 대표

 

2000년대 초 원광대병원 응급의학과 박재황 교수를 중심으로 영남과 호남, 충청을 아우르는 삼남응급의학회를 조직하면서 도병수는 영남을 대표해 창립 멤버로 참여한다. 광주·전남에서는 전남대병원 민용일 교수, 전북에서는 전북대병원 이재백 교수, 충청에서는 충남대병원 유인술 교수 등이 중심이었다. 한강 이남의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3개 지역 응급의료 전문의들이 모이는 것에 의미를 두고 학술과 친목, 연구 등을 통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도병수는 대한응급의학회 대구·경북지회 창립 멤버로도 활동하며 응급의료의 지역화를 향한 시동을 걸었다. 질환이나 산업, 사고가 지역마다 다를 수 있어서 이를 지역별로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응급의료시스템도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달리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대구·경북 지역만의 특색을 반영한 응급의료를 만들자는 차원이었다. 예를 들어 대구·경북은 산악지역이 많아 이곳에서 부상이나 외상, 교통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이를 분석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 같은 것을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식이다.

 

대한민국 응급의료 현실에 낙담

 

도병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생겨난 영동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를 벤치마킹했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응급의료의 원조 미국을 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제대로 된 응급의학을 배우는 게 소망이었다. 그의 희망은 오래되지 않아 이루어졌다.

19968월 미국 Cleveland clinic foundation 응급센터로 1년 과정으로 연수를 떠났다. 그곳에 도착해 응급센터를 둘러보는 순간 무척 조용한 것에 놀랐다. 하루에 환자가 150~200명이 오지만 시끄러운 적이 없었다. 환자 이외에 보호자들도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달랐다. 우리는 그 정도 환자가 응급실에 오면 환자와 보호자 등이 한꺼번에 뒤섞이면서 일시에 난장판으로 변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 어떻게 저럴 수 있노?”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미국의 응급의료시스템은 확연히 달랐다. 자기들 기준에 안 맞는 응급환자가 오면 곧바로 퇴원시켰다. 검사한 뒤 위중하지 않은 환자는 집으로 돌아가도록 권유했다. 응급실에서 검사한다고 시간을 끌거나 이 과 저 과에서 심한 환자를 받지 않으려고 서로 떠넘기는 지체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환자는 바로 해당 임상과에서 즉각 데려갔다. 미국의 보험제도와 임상과의 경쟁 수입 구조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의료보험 자체가 사보험에다 응급실 환자를 늦게 처리하면 관련 의료인을 가차 없이 자르든지, 금전적으로 손해를 입히는 시스템이 되어 있었다.

미국은 본인이 가입한 보험회사하고 계약하지 않은 병원에 가면 안 된다. 중증이 아닌데도 입원을 고집하면 그만큼 병원비가 쏟아진다. 엄청난 의료비 때문에 자신이 가입한 의료보험과 연계되지 않은 병원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국민 모두 똑같은 보험을 적용받기 때문에 환자들이 대학병원과 같은 대형병원을 찾는 경향이 크다. 이 때문에 응급실은 항상 도떼기시장과 같았다. 환자는 입원이 안 된다고 떼를 쓰며 아우성을 치고, 병실은 밀려드는 환자를 처리하지 못해 항상 꽉 차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나라와 정반대였다. 그런 상황을 보는 도병수에게 언제쯤 우리나라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부러웠다.

도병수는 응급실이 환자로 붐비는 것을 막는 해결점을 찾으려고 미국 응급의료시스템을 더 유심이 지켜봤다. 해결방법을 찾으려 했다. 미국에서는 과 간 경쟁 시스템 때문에 응급실에 환자가 오면 빨리 처치해 입원이 신속했다. 안 되면 연결시스템이 잘 작동돼 타과에 연락하는 시스템도 철저히 지켜졌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전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의료보험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입한 사보험에 따라 치료범위가 정해진다. 환자 자신이 보험을 들 때 어느 병원과 연결되는지, 자신이 병원을 찾았을 때 어디까지 커버가 될 수 있는지 파악해 그곳만 이용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의료보험과 연계되지 않는 대형병원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의료비가 엄청 많이 나와 이용이 쉽지 않다.

미국에는 환자가 가입한 보험회사와 연결된 병원에 가면 해당 과에서 바로 조치를 한다. 응급실이나 입원실에 배치도 신속하다. 환자가 입원 의사를 밝혀도 주치의가 “No”라고 판단하면 환자들은 이를 잘 따라준다. 이 때문에 응급실에서 150명 중 50명은 곧바로 퇴원한다. 나머지 100명에 대해서는 전원(轉院, 병원 간 이송)을 보내든지 아니면 입원하든지 결정한다. 응급실에서 보호자들이 붙어있는 사례도 거의 없어 병원 전체가 조용한 편이다.

또 미국 병원의 응급실 내에 심장 처치방, 외상 처치방, 소생실 등 전문 분야별로 방이 따로 갖추어져 있고 심혈관 촬영기와 초음파 기기 등 전문 의료기계도 다 설치되어 있다. 빨리 시술하고 바로 입원시킬 수 있는 구조로 짜여 있다.

선진국다운 응급의료시스템을 자랑하고 있다. 전문 임상과 의사를 호출하는 코디네이터 간호사도 따로 있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해당 과에 연락해주세요라고 하면 바로 연락한다. 연락이 안 되면, 안 되는 이유와 연락시간 등을 다 기록해 놓는다. 책임 여부를 명확히 밝히자는 차원이다. 우리나라는 연락이 안 되면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데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호출(call) 시스템부터 시작해 환자 처리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유기적으로 돌아갔다.

선진 응급의료시스템을 보고 온 도병수는 한국도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 그런 시스템을 적용해 해결은커녕 오히려 다른 과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기존에 계속 내려온 각 과의 관행이 실질적으로 의료계를 지배하고 있었고 응급실에 있는 전문의 한 명이 미국의 선진 응급의료시스템을 보고 고치자고 주장한다고 해도 말이 먹히지 않았다.

응급의학과 의사에 대한 처우가 좋지 못했다. 응급의학 전문의가 없어도 환자치료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다른 임상과 전문의들의 뿌리 깊은 의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을 향해 지들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너희들이 없어도 병원은 잘 돌아가.’ 그런 식이었다.

예전부터 내려온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응급의학 전문의가 있으나 없으나 환자치료에는 똑같은 것으로 간주한 것이 문제였다. 미국 응급의료시스템을 1년을 지켜본 뒤 한국으로 돌아와 응급실에 이를 적용하려 해도 반발에 부딪힌 도병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절망감이 들었다. 도병수는 포기하고 외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되돌릴 수도 없었다. 응급의학과로 상당히 발을 디뎌놓아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은 응급의학과 의존도가 굉장히 높아졌다. 다른 임상과 전문의들도 환자가 오면 응급의학과가 먼저 처리하겠지, 라는 생각을 한다. 응급의학과가 신생과로 시작할 때보다 지금은 훨씬 좋아졌다.

영남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영남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응급환자 분류체계(triage) 중요

 

2003218일 오전 953분경 대구시 중구 남일동의 지하철 1호선 중앙역. 이곳에 들어오던 제1079호 열차에 타고 있던 50대 중반의 정신지체 장애인이 가지고 있던 플라스틱류 기름통(시너) 뚜껑을 열어 라이터를 켜는 순간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불이 전동차 내부로 급격히 퍼졌다. 불이 번지는 순간 제1079호 열차는 중앙로역에 정차 중이어서 승객들이 대부분 빠져나갔다.

불은 반대편 선로에서 진입해 정차한 제1080호 열차로 순식간에 옮겨붙었다. 그러나 이 열차의 기관사가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불은 맹렬히 번졌다. 이 사고로 열차는 완전히 불에 타 뼈대만 남았고, 중앙로역 천장과 벽에 설치된 환풍기, 철길 바깥쪽 지붕들도 모두 녹아내렸다.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다치는 대규모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대부분 현장에서 사망했지만, 화재진압 이후 일부 유독가스를 흡입한 환자 30여 명이 한꺼번에 영남대병원 응급실 등으로 긴급히 옮겨졌다. 도병수도 호흡기 내과 전문의들과 함께 응급실로 달려온 환자들 치료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중환자를 우선 치료순위로 두고 다른 과 전문의들과 협진을 하면서 처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환자가 구급대원에 실려 응급실로 옮겨졌다. 환자는 호흡이 완전히 멎었고, 얼굴을 비롯해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옷은 다 타 피부가 새까맣게 노출돼 한눈에 봐도 사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환자였다. 남녀 구분조차 쉽지 않을 정도였다.

도병수는 순간적으로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 환자를 옮긴 구급대원들에게 곧바로 호통치듯 말했다.

아니, 이렇게 화상이 심한 환자를 응급실에 데려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분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임시영안실로 모셨어야죠…….”

구급대원들이 중증도에 따라 현장에서 환자를 분류하는 것이 중요했는데도 전혀 매뉴얼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화가 난 것이다. 현장 응급의료 지휘체계가 이렇게 주먹구구식일 줄이야.

현장에서 환자를 보고 죽은 환자는 임시영안실, 중환자면 대학병원, 경환자는 1·2차 병원 등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중증도 또는 부상자를 분류하는 응급환자 분류체계인 트리아지(triage) 조차 교육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응급실은 한꺼번에 몰려든 환자로 점점 업무가 마비되어가고 있는데, 숨진 환자까지 응급실로 후송하는 것은 다른 응급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었다.

구급대원들은 책임감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 봐도 사망인 상태의 환자를 데려오면 응급실은 마비될 수밖에 없어 도병수는 그런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이 일은 대량재해가 발생했을 때 응급환자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트리아지에 대한 교육과 교재를 만든 계기가 되었다.

 

후배에 도움 주려 응급의학 관련 도서 발간

 

도병수는 응급의학과 관련된 도서 중 관련 분야에서는 처음인 책을 많이 썼다. 대표적인 도서는 응급의료용어집(2005)과 응급실 근무자를 위한 응급의료와 의료분쟁(2007), 응급의료체계(2007) 등이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알아야 할 내용이 담긴 도서를 우선 만들었다. 후배들이 시행착오 없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었다. 양질의 도서를 선배들이 많이 만들어놓으면 응급의학의 발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도병수가 응급의학을 막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관련 도서가 없었다. 발품을 팔아 일부 도서를 복사하거나 미국의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상황에 맞는 응급의학 교재를 많이 발간해 후배들이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도병수는 또 주위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소송을 당하는 사례를 많이 목격했다. 그런데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 제대로 된 교재마저도 없었다. 이 같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응급실에서 소송당하기 쉬운 것, 소송을 당하더라도 어떤 것이 쟁점이 될 것인가, 그런 것들을 연구한 응급의료분쟁 도서를 만들었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최소한 알아야 할 법률적인 분쟁을 정리한 책이다.

미국은 응급의학과 관련된 의료분쟁 자료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때가 응급의학의 시작이었고 관련 자료는 아예 없었다. 의료분쟁이 간간이 있었지만, 의료인들이 그런 부분에 밝지는 못했다. 어이없이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알고 대처하면 선의의 피해를 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만든 것이다.

박성준 충남 공주의료원 교수가 모았던 판례를 많이 참조했다. 법조계에 있는 사람에게 자문도 받아 내용을 종합적으로 알차게 꾸몄다.

도병수는 이 밖에 응급의학 전문의들이 사용하는 응급의료 용어도 정리했다. 응급의학 용어가 전부 뒤죽박죽이어서 이를 체계적으로 만들 필요를 느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사용하는 응급의료 용어를 하나로 통일해 응급의료체계가 제대로 정착되기를 바랐다. 응급의료 종사자 및 일반인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국가표준의 응급의료용어를 제정함으로써 응급의료정보, 응급의료체계, 응급의학 학술 분야의 교육 및 연구에 있어 혼선을 방지하고 싶었다.

도병수는 또 갑자기 길거리 환자가 생겼을 때 어떻게 응급처치를 하고, 어떤 병원으로 옮기며, 이를 병원에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를 정리한 응급의료체계 관련 도서도 만들었다.

 

도병수 교수 프로필

 

학력

 

영남대 의과대학 졸

영남대 의학석사

영남대 의학박사

 

경력

 

일반외과 전문의, 응급의학 전문의,

미국 Cleveland clinic foundation 응급센터 연수,

미국응급의학회(ACEP) 회원

미국중환자의학회(SCCM) 회원

대한응급의학회 이사

삼남응급의학회 회장

대한응급의학회 대구·경북 지회 회장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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