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생의학 개념, 응급실에 처음으로 적용
아시아응급의학회 유치해 학회 위상 강화

 

강의 도중 심장마비로 갑자기 쓰러져

 

20121024~26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Pan-pacific Emergency Medicine Conference(PEMC)’라는 국제학회가 열리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응급의학 전문의들이 모인 국제학술대회였다.

대회 기간 그랜드볼륨에서는 심폐소생술(CPR)의 최신 치료요법 특강이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연사는 심폐소생술을 응급의학에 처음으로 도입해 발전시킨 황성오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였다. 응급의학과 전문의에게는 누구나 필요한 최신 심폐소생술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강의는 청중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500여 명의 응급의학 전문의들이 새롭게 바뀐 심폐소생술 술기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듣고 있었다. 특히 이 섹션의 좌장은 응급의학 교과서를 쓴 세계적인 석학 틴티넬리(Tintinalli)와 서길준 서울대 의대교수가 맡아 그 어느 강의보다 열기가 뜨거웠다.

황성오도 학회 전문의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고 듣는 강의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열과 성을 다해 강의해 나갔다. 그러나 이날 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꼈다. 피로하고 가슴에 가끔 통증이 느껴졌고 숨 쉬는 것도 불편했다. 황성오는 강의를 준비하느라 밤잠을 설치고 긴장감이 쌓여서 그런 것으로 가볍게 여겼다. 하지만 강의를 진행하면 할수록 호흡이 점점 가빠졌고, 온몸에 식은땀이 계속 흘러내렸다. 얼굴은 창백해져갔다. 이상했다. 더이상 강의 진행이 어려울 것 같았다.

황성오는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다 거친 숨을 몰아내며 “My heart aches so much……라고 말한 뒤 그대로 쓰러졌다. 황성오가 강의 도중 갑자기 의식을 잃자 그랜드볼륨 강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틴티넬리를 비롯한 응급의학 전문의들이 황성오 주위를 재빨리 둘러쌌다. 일부는 곧바로 119를 불렀다. 자동제세동기를 신속하게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응급의학 전문의들이었기 때문에 심폐소생술과 자동제세동기로 응급조치를 취할 즈음 황성오는 다시 의식이 돌아왔다. 완전한 심장마비는 아니었다. 심장에 허혈이 생기면서 맥박이 떨어지니 뇌로 가는 피의 양이 줄어들면서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혼자 있었다면, 어쩌면 목숨이 위험했을 상황이었다. 3~4분 만에 의식이 돌아와 응급조치는 취하지 않았지만, 심장의 연축(혈관 근육이 오그라들어 심하게 좁아지는 현상)이 풀리지 않았다면 곧바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잠시 의식을 잃고 깨어난 황성오는 강의를 마저 끝냈다. 지독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강의를 모두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병원을 찾았다. 심장혈관을 찍은 뒤 관상동맥에 문제가 있다는 소견을 들었다. 심장마비 환자를 그렇게 많이 보고 치료했지만, 그게 자신에게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뒤 황성오는 병원에서 맡고 있는 기획조정실장을 비롯한 모든 보직을 내려놨다. 외부활동도 줄이고 꼭 필요한 연구 활동만 하기로 했다. 이 사건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다. 심장마비에 대한 인식이 더 높아져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급사는 평범한 사람, 건강한 사람 누구에게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심장마비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어 일반인 인식도 높이고 대비가 잘 되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심장마비 환자의 전체 2/3 정도는 별 증상이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찾아오는 무서운 병이라는 걸 실제 체험을 통해 생생하게 깨달았다.

그런데 대부분 일반 사람들은 심장마비는 자신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생각하고 있어 문제였다.

2011년 아시아응급의학회 국제학술대회
2011년 아시아응급의학회 국제학술대회

 

90년대초 병원 밖 심장마비 환자 대부분 사망

 

지금은 심장마비가 오면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구급대원이 무조건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 자동제세동기를 활용해 최대한 응급조치를 취하는 것이 매뉴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병원 밖에서 심장마비 환자가 생기면 구급대원들은 전혀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았다. 자동제세동기 장비도 없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심장마비 상태로 환자를 그대로 병원까지 데려왔다. 구급대원들은 심폐소생술 교육도 받지 않아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병원에서 벌어진다.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하면 인턴이 환자의 맥박과 호흡이 없으면 심폐소생술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챠트에 DOA(Death on Arrival, 도착시 사망 상태)를 적으면 끝이었다. 관행처럼 이어져 온 심장마비 환자에 대한 대처방법이었다. 심폐소생술은 병원 내 심장정지 환자에게만 일부 실시했을 뿐 병원 밖 심장마비 환자는 전부 DOA로 처리했다.

인턴의 소견 하나만으로 그 환자는 곧바로 영안실로 옮겨졌다. 생존할 수 있는 실낱같은 찬스도 없었다. 의료진은 호흡과 맥박이 없으면 죽었다고 무조건 생각했다. 심폐소생술 방법도 몰랐다. 황성오도 내과 전문의 과정 때 응급실에 당직을 서다 그런 환자가 오면 DOA로 곧바로 처리하곤 했다. 내과에서도 체계적으로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지 못했다. 선배들 하는 걸 어깨너머 배운 것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수없이 지켜본 황성오는 항상 궁금한 부분이 있었다. 왜 병원 내에서는 심폐소생술을 적극적으로 하는데 밖에서 온 사람들은 하지 않나,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멀지 않아 풀렸다. 모두가 병원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병원 내에서 이뤄지는 심장마비 환자에 대한 대처만 제대로 하면 될 뿐이었다. 심장 치료하는 것만 해도 바빠 신경 쓸 겨를이 나지 않은 것이다. 심장마비는 짧은 시간에 생사가 좌우되기 때문에 굳이 밖에서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심장내과를 전공한 황성오만이 느낄 수 있는 문제점이었다. 황성오는 내과 전공의 시절, 병원 밖에서 발생하는 심장마비 환자를 무조건 사망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초기 응급처치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19913월 황성오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병원이 심장 전공 내과 전문의를 영입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병원 밖 심장마비 환자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매일 해외논문을 뒤졌다. 그가 알지 못했던 뜻밖의 새로운 사실을 해외논문에서 찾았다. 병원 밖 심정지 발생 환자 중에 살아난 사람이 꽤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 밖에서 발생한 심정지 환자의 생존율은 5%로 보고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다 사망하는데 외국에서는 생존율이 5%나 됐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병원 밖에서 심장마비가 오면 심폐소생술을 시도조차 안 하지만 외국 선진국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응급의학과로 소속을 옮긴 뒤 심장마비 환자를 응급의학과에서 제대로 다룬다면 사망률이 지금보다 더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다.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을 때 미국 시애틀은 생존율이 15% 이상이었다.

황성오는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도 매년 2~3만 명의 심장마비 환자가 생기는데, 제대로 응급조치를 한다면 적어도 몇천 명은 살 수 있을 거야! 병원 밖 심장마비 환자에게 아무런 조치를 않는 것은 응급의료를 하는 의사로서 할 행동은 아니지…….’

그는 1992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에 내원한 병원 밖 심장마비 환자의 데이터를 분석한 뒤 1993년 그 결과를 국내 처음으로 학회지에 발표했다. 그들을 대상으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한 결과 생존율이 3%로 높아졌다는 내용이었다.

 

 

심장마비 환자 오면 무조건 CPR하라

 

안무업은 1991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응급의학과 첫 레지던트로 전공의 과정을 시작했다. 전공의 과정 중 인턴 때와 다른 점을 발견했다. 차이점은 스승인 황성오 교수가 병원 밖에서 온 사망환자에게 무조건 심폐소생술을 하라고 한 지시다.

병원 밖 심장마비 환자가 응급실에 오면 심전도를 찍고 심정지(Standstill)DOA로 처리해 영안실로 내리는 게 관례였다. 그동안 해왔던 것과 달리 스승이 환자가 오자마자 무조건 심폐소생술을 하라고 해 이상했다.

시체에 무슨 CPR을 하지?’

안무업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응급실 직원들 모두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스승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오는 환자에게 별 무의미하게 CPR을 했다. 그렇게 10여 명의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죽었던 환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11번째 심장마비 환자가 구급차로 긴급 후송됐다. 이번에도 마지못해 심폐소생술을 해나갔을 무렵 안무업은 깜짝 놀랐다. 20~30분을 했을 때 멈췄던 심장이 갑자기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어어~ 시체인데 심장이 뛰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죽었다고 여겨 DOA로 처리하고 했는데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그래서 교수님께서 병원 밖에서 오는 심장마비 환자에게도 CPR을 하라고 하셨구나!’

그때 알았다.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의 심장이 다시 뛸 수 있다는 걸.

안무업은 그 이후에도 가끔 그런 경험을 겪었다. 치악산 밑에 살던 어르신이 담배를 피우다 갑자기 심정지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왔다. 그 환자는 안무업이 심폐소생술을 한 20번째 환자였다. 이 환자도 40분 정도 심폐소생술을 한 뒤 의식이 돌아왔고 중환자실에 입원한 뒤 3일 만에 눈을 떴다. 다시 이틀 뒤에 의식이 완전히 회복한 걸 직접 눈으로 생생하게 지켜봤다. 심폐소생술의 중요성을 차츰 알 수 있었다.

안무업과 마찬가지로 황성오도 심폐소생술로 살아난, 기억나는 환자들이 많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두 명이다.

한 명은 개인병원에서 출산하다 출혈이 너무 심해 심장마비가 온 산모였다. 30차례 정도 심장마비가 왔지만, 끝까지 CPR을 시행해 무사히 살아났다. 또 한 명은 급성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실려 온 의사였다. 이 환자도 심실세동과 부정맥으로 인해 64차례의 심장마비가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결과 목숨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심폐소생술의 효과를 입증한 사례였다.

이러한 사례를 한꺼번에 모아 황성오는 심장학회 잡지에다 논문을 발표했고, 이후 응급실 대부분에서 심폐소생술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황성오는 또 원주세브란스병원에 온 이듬해인 1992년 심장내과에서만 사용하던 초음파 기기를 응급실에 설치해 직접 돌렸다. 그 전에 증례발표는 있었지만, 응급실에 경식도 심장 초음파를 설치한 건 원주세브란스병원이 처음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이러한 사례는 드물었고 우리나라가 초기에 하는 시도였다. 심장내과에만 있던 심장 초음파를 응급실로 끌어내린 것이다.

경식도 초음파는 식도를 통해 초음파 탐촉자를 넣는 것으로 심장 바로 뒤에 위치해 심장의 모양이나 혈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어서 심장 상태를 파악하고 즉각적 처치를 가능하게 한다. 황성오는 심장마비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할 때 심장의 상태를 직접 보고 판단하는데 경식도 초음파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지금은 응급의학과에서도 심장 초음파 검사를 많이 실시한다. 심장내과에서 배운 심장 초음파를 응급의학에 접목한 황성오 덕분이었다.

명의로 선정된 황성오 교수
명의로 선정된 황성오 교수

 

소생의학(resuscitation) 개념 도입과 응급실 적용

 

- 소생의학 공부

 

황성오는 평소 소생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소생의학은 응급의학과와 가장 연관이 많은 분야였다. 국내에 연구자가 아예 없었던 것도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배경이었다. 외국에서는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국내에는 응급의학 개념도 정립되지 않았을 때라 이 분야는 더더욱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학문적인 깊이로 봤을 때 응급의학은 한 부분만 잘하는 것보다 여러 임상 분야를 모두 섭렵하고 있는 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황성오에게 소생의학은 응급의학에서 꼭 다루어야 할 전문분야 중 하나로 여겨졌다.

소생의학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그는 1995728일 미국 버지니아 의과대학(Medical College of Virginia)으로 연수를 떠난다. 그곳에는 주임교수인 오나토(Ornato)가 그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는 황성오처럼 심장내과 전문의였으며 응급의학을 전공하면서 세부 분야로 심폐소생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의사였다.

황성오는 평소 관심이 많았던 소생의학을 오나토에게 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고, 동시에 개인적으로 자동심폐소생기 개발을 위한 동물실험을 하고 있었다. 1년간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자동심폐소생기 개발을 위한 연구는 한국에서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우리나라 처음으로 소생의학 개념을 응급의학에 적용해 활용하기 시작했다. 초기 심장마비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소생의학을 더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1998년 신촌세브란스병원 김승호 교수와 함께 소생의학연구회를 만들어 확산에 나섰다. 소생의학은 단순히 심폐소생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세동과 심장정지 후 치료까지 하는 방법이라는 걸 널리 알려 나갔다. 이러한 움직임이 대한응급의학회에도 영향을 미쳐 학술대회에서 심폐소생술 세션이 만들어졌다.

황성오의 이런 노력은 대한응급의학회에서 심폐소생술과 관련한 학문이 더 활발하게 논의할 수 있는 모멘텀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소생의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고 활발한 연구 분야 중 하나로 올라올 수 있었다.

대한심폐소생협회를 만든 황성오 교수
대한심폐소생협회를 만든 황성오 교수

 

- 대한심폐소생협회 창립

 

심장마비 응급환자의 처치는 응급의학과 만의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심장마비가 발생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초기 응급처치에서 심폐소생술이 가장 중요하지만, 의사가 항상 현장에 있을 수는 없다. 심정지 환자를 보면 의사든 일반인이든 누구나 즉각적으로 응급처치를 해줘야만 환자가 후유증 없이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모든 사람이 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어야만 한 명이라도 생명을 더 살려낼 수 있다. 제대로 된 심폐소생술 교육이 시급한 이유다.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의사는 물론 일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만 사망률을 줄일 수 있다.

황성오는 1998년 대한의학회에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을 함께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일반인들에게 심폐소생술을 가르쳐야 합니다. 심장마비는 병원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많습니다. 외국은 교육프로그램이 많이 개발돼 적용되고 있고,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가이드라인을 하루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의학회의 대답은 차가웠다.

무슨 가이드라인을 의학회에서 만들어요?”

단번에 거절했다.

각 단체에서 알아서 만들어 활용하세요.”

싸늘한 대답이 이어졌다.

그러나 황성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한의학회가 나서지 않는다면 다른 관련 학회 등과 함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심폐소생술이 왜 응급환자에게 중요한가를 설득시켜 나갈 계획이었다. 응급의학회 단독으로 협회를 만들 수도 없었다. 워낙 연계된 학회와 관련 단체가 많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2000년 황성오는 대한응급의학회와 대한심장학회에 제안해 심폐소생술 관련 TF팀을 구성한다. 그리고 2년 뒤 은사였던 신촌세브란스병원의 김성순 교수와 공동으로 대한심폐소생협회를 만들었다.

심폐소생술을 국민에게 전파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협회에는 대한응급의학회와 대한순환기학회가 주축이 되어 대한마취과학회, 대한신경과학회, 대한소아과학회 등과 같은 의사 학술단체와 대한간호협회, 대한응급구조사협회, 대한적십자사 등 총 8개 단체가 참여했다.

심폐소생술은 응급의학의 고유영역이 아니지만, 주로 응급의학과에서 많이 활용했다. 이 때문에 협회도 응급의학과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협회는 5년마다 새로 바뀐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새로운 의술에 반영하며 교육 확산과 인식을 높여나가고 있다.

현재 협회에서 일하는 사람 상당수는 응급의학회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응급의료 영역에서 심폐소생술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협회가 생겨나면서 응급의학회 회원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진 것도 학회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일이었다. 응급의료와 관련한 학술적인 연구는 응급의학회가 주로 하지만 심폐소생술에 관한 사회적·교육적인 부분은 협회의 몫이었다.

대한심폐소생협회는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 제정과 교육프로그램 개발 및 보급, 심폐소생술 교육 등 심폐소생술 전문단체로서의 선도적 역할을 활발히 수행하고 있다. 특히 2006년 한국형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을 첫 제정한 이후 5년마다 한 번씩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있다. 지난 2020년 말 3번째 개정 작업을 통해 최신 심폐소생술 가이드라인을 알리고 있다.

황성오는 이와 관련 생존사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병원 밖 심장정지 환자가 생존하려면 신속한 심장정지 확인과 신고-신속한 심폐소생술-신속한 제세동-효과적 전문소생술-심장정지 후 통합치료로 연결되는 소위 생존사슬(chain of survival)’이 효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생존 사슬의 초기과정에서는 현장 목격자의 역할이 중요하죠. , 목격자가 심장정지를 확인하고 응급의료체계에 구조를 요청하기 위한 신고를 하고, 즉시 심폐소생술 시작과 자동제세동기를 사용해 심실세동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는 응급의학과 교수가 되어 생존사슬을 연결해주면서 심장마비로 병원을 찾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일생동안 의대교수로 있으면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자평한다.

심장마비는 흔한 질환이 아니다. 짧은 시간에 생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연구도 쉽지 않다. 생사가 금방 결정되기 때문에 심폐소생술에 어떤 치료를 넣거나 빼는 것은 부담이다. 황성오는 다른 분야보다 이 분야는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심장마비 환자는 열심히 치료해봐야 10%를 살리지 못하고 90%가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의사로서 할 일이 많다고 여긴다. 이 분야의 발전이 너무 늦고 연구 등이 많이 필요한데도 실제 관심이 별로 없는 걸 안타까워한다. 연구하기가 너무 어렵고 생존율도 획기적으로 올라가지 않는 게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심장마비에 관한 연구는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황성오는 최근 강의에서는 심장마비 예방 쪽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심장마비가 오면 10명 중 9명이 죽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치료적 측면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예방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느낀다. 30년 동안 연구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 한국심장정지연구 컨소시엄 구성

 

심폐소생술 연구와 관련해 외국에는 관련 데이터를 올릴 수 있는 등록체계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데이터가 많지 않고 연구하는 기회도 별로 없다. 황성오에게 이 부분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다.

황성오는 신상도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와 함께 한국심장정지연구 컨소시엄을 2013년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심장정지 데이터를 전체적인 등록체계로 묶어 젊은 학자가 논문을 많이 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곳에는 현재 2만 개가 넘는 심장정지 관련 데이터가 쌓였다. 요즘 들어 SCI 논문이 10개 이상 발표되는 성과도 이루어냈다. 데이터가 하나하나씩 모여 심장정지 환자 연구에 중요한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다.

컨소시엄에는 60여 개 대학병원 응급의료기관을 비롯해 200여 명의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응급의학, 심장, 소아 연구자까지 다 포함돼 있다. 컨소시엄 플랫폼에 각 병원에 오는 심장정지 환자 데이터를 등록해 공동으로 사용한다. 임상 과에 상관없이 심장정지를 연구하려는 연구자는 누구나 참여해 갈수록 성과가 높아지고 있다.

황성오 교수는 컨소시엄의 성과를 이렇게 평가한다.

첫째, 연구할 수 있는 데이터가 모이는 것이 가장 큽니다. 그 데이터를 가지고 참여자는 누구나 논문을 쓸 수 있게 된 것이죠. 둘째, 연구자끼리 워크숍을 하면서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것이 컨소시엄의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2009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아시아응급의학회 국제학술대회
2009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아시아응급의학회 국제학술대회

 

아시아응급의학회 국제학술대회 유치

 

2001년부터 아시아응급의학회 이사로 참여하고 있었던 황성오는 2009년 열리는 아시아응급의학회 국제학술대회 개최지를 놓고 치열한 선정 경쟁에 직접 발 벗고 나섰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인도와 바레인 등 3개국이 유치경쟁을 벌였다. 아시아응급의학회는 1998년에 창립해 우리나라를 비롯해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타이완, 일본, 바레인, 태국, 인도 등 아시아의 주요 국가를 회원국으로 하는 응급의학 분야의 국제학술단체다. 국제학술대회 개최는 그 나라 응급의학의 위상을 높이고 학회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모두 사활을 걸고 유치에 총력을 기울인다.

황성오는 대한응급의학회가 1989년 창립돼 탄탄한 기반을 다지고 있고 전문의 배출도 10년이 넘어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아시아응급의학회에 적극적으로 알려나갔다. 개최 예정지로 해양도시인 부산을 내세워 이곳의 입지적 여건의 강점은 물론 학회 회원들을 위한 다양한 연관 프로그램도 선제적으로 제시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대한응급의학회 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아시아응급의학회 국제학회 개최지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국제학술대회 개최는 곧바로 학회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대회 이후 학회의 위상은 급격히 올라섰다. 아시아에서 응급의학회 전체 국제회의를 개최한 국가는 몇 나라 되지 않는 것도 대한응급의학회의 자랑이었다. 당시 유럽이나 호주의 응급의학 전문의들을 많이 불러 강의하면서 응급의학의 흐름을 회원들에게 유용하게 제공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응급의학을 아시아는 물론 세계로 알리는 계기로 활용했다. 이런 게 모여 2019년 인천에서 열린 세계응급의학회 유치의 발판이 되었다.

황성오 교수가 특허를 출원한 자동심폐소생기
황성오 교수가 특허를 출원한 자동심폐소생기

 

논문과 특허 등 타의 추종 불허

 

황성오의 응급의학 및 소생의학과 관련한 논문과 특허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다. 그는 총 280여 편의 국내외 연구논문과 심폐소생술과 전문소생술을 포함한 21편의 전문서적 저술, 25건의 국내외 특허 등록 등을 냈다. 응급의학 분야에서는 탁월한 성과를 낸 학자였다.

특히 심장마비 환자의 소생에 필요한 심폐소생술을 자동으로 처리하는 심폐소생기(X-CPR)를 개발해 국내외에 특허를 출원했다. 환자 가슴 압박만으로 혈류를 유발하는 수동 심폐소생술이나 기존 심폐소생기보다 혈류량을 최대 3배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자동심폐소생기를 개발해냈다. 자동심폐소생술 장치를 상용화해 응급의료기기산업 발전 및 환자치료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가 선정한 제1회 의료기기 산업대상 수상자로 뽑혔다.

국제학회도 그의 학술적 연구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2006년 미국심장학회(AHA)는 황성오를 젊은 과학자 상수상자로 선정했다. 미국심장학회 소생의학 심포지엄에 제출한 두 편의 논문이 큰 호응을 얻으며 우수한 젊은 과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심정지를 유발한 동물의 심폐소생술에서 흉부압박-인공호흡 비율의 효과 비교라는 논문을 통해 현재는 흉부압박-인공호흡 비율이 302로 권장되고 있지만 151이 적합하다는 실험결과를 발표했다.

학술뿐 아니라 의술에서도 인정받았다. 2007년 응급의학과 전문의 중 처음으로 EBS가 선정한 명의로 뽑혔다. 24시간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 곳 응급실, 그 생명 최전선의 현장에서 사람을 살리는 학문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으로 황성오 교수를 선정해 반영했다.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전국 최초 응급의학교실 개설한 원주세브란스병원

 

원주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는 198951일 만들어졌다. 다음 해인 199061일 전국 처음으로 의과대학에 응급의학교실이 들어섰다. 영동세브란스병원이 1987년 응급의학과를 병원 내 처음으로 개설했다면, 전국 최초로 응급의학교실을 만든 곳은 원주세브란스병원이었다.

임상을 다루는 응급의학과는 병원에, 의대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응급의학교실은 의과대학에 생긴다. 교실이 생겨남으로써 응급의학을 연구하는 학문 단위가 별도로 만들어지게 된다. 응급의학과가 의사를 수련시킨다면, 응급의학교실은 의과대학에서 응급의학을 연구하고 가르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 최초라는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초창기 개척자의 고민은 그 누구보다 많았다. 학과를 만든 임경수 교수와 비록 2년 뒤에 합류한 황성오는 응급의학과가 계속 그 존재를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이 깊었다. 학과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것을 비롯해 초기 다른 임상 과들의 냉랭한 반응에 힘들었다.

그러나 꿋꿋이 이를 이겨냈고, 개설 30년이 넘은 지금은 강원 지역 대표 병원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배경에는 원주세브란스병원 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운영시스템 때문이었다.

원주세브란스병원은 응급의학 내에서 분과가 잘된 곳으로 유명하다. 황성오가 이 병원 교수로 부임했을 때 선배였던 외과 전문의 출신 임경수 교수는 외과를, 내과 전문의 출신 황성오는 내과를 맡았다. 다른 응급의학과와는 완전히 다르게 학과를 운영했다. 지금은 다른 응급의학과도 그렇게 운영하는 곳이 있지만, 초기부터 분과 운영체제로 하지는 않았다. 원주세브란스병원 만의 독특한 운영방식이었다.

인원이 점점 많아진 2000년에 들어서면서 병원은 소생의학 분야와 내과 쪽, 그리고 외상과 외과 쪽으로 추가 분화했다. 교수마다 자기 분야를 정해 치료 및 연구를 했고, 당직을 설 때는 모든 환자를 다 보았지만 회진할 때는 자신이 맡은 분야만 담당했다. 임상적으로는 심혈관 계통, 뇌 신경계 질환, 호흡기 질환, 복부 쪽 내과계 질환, 외상 분야, 그런 식으로 구분해 치료했다. 학문적으로는 소생의학, 중독학(일산화탄소), 외상외과(응료의료체계) 3분야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했다.

응급의학 내에서 세부별로 전문분야를 나눠 연구 및 치료를 시도했다. 이 때문에 수련을 받는 레지던트들은 궁금한 사항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보통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은 세부 분야 전문성보다는 다양한 응급처치 능력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아직 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응급의학과 수련의들은 해당 다른 임상과 교수에게 치료 방법 등을 묻곤 했었다. 그렇지만 원주세브란스병원은 세부적으로 분야를 나눠 연구한 덕분에 응급의학과 자체 내에서 모든 의료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분과된 의료운영체계로 인해 원주세브란스병원은 심정지 환자의 치료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고, 중독 쪽을 특화해 일산화탄소 중독센터가 생길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학술적으로도 각 분야에서 자기 분야만 연구한 덕분에 연구의 수월성도 생겼다. 암과 같은 일부 질병의 역량에서는 서울 대형병원이 뛰어나지만, 강원도에서 응급질환이 생겼을 때 특화된 전문성으로 지역 주민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만족했고 이는 곧 병원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져 환자가 몰리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황성오 교수 프로필

 

학력

연세대 의과대학 졸

연세대 의학석사

고려대 의학박사

 

경력

응급의학전문의, 내과전문의, 순환기 내과 전문의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응급의학교실 교수, 주임교수

연세대학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기획관리실장, 원주의료원 기획조정실장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

아시아응급의학회 회장

대한심폐소생협회 이사장

한국심장정지연구컨소시엄 의장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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