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학 최초로 응급의학과 개설…지역화 시동
저체온 치료와 에크모를 응급의료에 도입

신생아 심장 수술 명의(名醫)를 꿈꾸며

 

19926, 민용일 전남대병원 흉부외과 펠로우는 신생아 심장 수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후쿠오카 소아병원으로 연수를 떠난다. 이 병원은 병상이 200여 개에 불과한 조그만 병원이었지만, 신생아 심장 수술에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곳이었다. 민용일은 이곳에서 술기를 더 연마한 뒤 본격적인 전문의사의 길로 접어들 계획이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후쿠오카 병원에 도착한 그는 이 병원의 카도라는 surgeon(외과 전문의)을 찾아갔다. 흉부외과 저널을 보고 카도에게 연락했는데 운 좋게 수술법을 알려주겠다는 답신을 받았다. 40대 초반의 카도는 그 나이에 복합심장기형 수술에서는 세계적인 명의(名醫)로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신생아가 태어났을 때 폐동맥과 대동맥이 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폐동맥·대동맥 양쪽을 잘라 제대로 바꿔주는 그런 선천성 기형을 안고 태어난 신생아 수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의사였다. 그의 손을 거쳐 간 신생아 환자 200명 중 199명이 살아나 생존율이 100%에 육박할 정도로 미다스의 손으로 통했다. 이는 국내 병원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있었다. 그 당시 국내에서 이런 선천성 기형 수술 사망률이 70%에 달할 정도였으니 그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겠는가.

 

민용일은 소아 심장수술 분야 최고 써전으로부터 복합심장기형 수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그는 6개월 동안 카도를 도와 150여 명의 신생아 심장수술에 빠짐없이 참여해 모두 성공했다.

이러한 소문은 국내 흉부외과 학회에도 순식간에 퍼졌다. 급기야 국내 모 국립대 병원 교수가 일본에 연수 중인 민용일에게 찾아와 수술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해 노하우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나중에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신생아 수술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민용일에게 짧지만 6개월의 일본 연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세계 최고 명의로부터 배운 술기 때문인지 어떤 수술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고 넘쳤다. 19921231일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민용일은 대한민국 최고의 신생아 심장 수술 전문의가 될 수 있다는 벅찬 희망으로 1993년 첫날부터 설레었다. 그의 기대는 곧 성취로 이어졌다. 어렵다던 신생아 심장 수술 환자 3명을 전남대병원에서 연속해 살려냈다. 전남대병원은 물론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는 새로운 기록을 계속 쓰고 있었고, 머지않아 소아 심장수술 분야 최고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한국에서 신생아·소아 심장 수술을 하는 곳은 서울대병원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부천세종병원 등에 불과했고, 전문의도 많지 않았다. 민용일에게 이 분야는 블루오션처럼 느껴졌다. 세계 최고 전문의로부터 술기를 배운데다, 평소 수술 실력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터여서 그의 앞길에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은 뻔했다.

그러던 1993년 초여름 어느 날, 민용일은 본과 4학년 때 지도교수였던 스승 노성만 전남대병원장으로부터 호출을 받는다.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교실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교실

 

국립대 처음으로 응급의학과 개설

 

원장실로 제자 민용일을 부른 노성만은 대뜸 물었다.

, 새로운 일을 개척해라.”

?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국에는 응급의학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하고 있더구나. 우리나라 대학병원에도 응급의학의 역할이 커질 거야. 네가 응급의학과를 개설해 좀 키워봐라.”

노성만은 민용일에 대한 신뢰가 강했고, 그에게 어떤 일을 맡겨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민용일에게 이는 일종의 강요나 마찬가지였다.

원장님! 저는 신생아와 소아 심장 수술 쪽에 승부를 걸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수술 결과도 좋고

노성만은 전도유망한 제자의 꿈을 꺾는 것 같아 미안함이 들었는지 민용일을 쳐다보지 못한 채 놓여있는 결재서류만 흘낏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저는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민용일은 곧바로 거절 의사를 보였다. 지금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를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너 언제까지 펠로우 할래? 교수로 발령 내줄꺼니까, 그렇게 해!”

노성만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고 단단했다.

그 당시에는 응급의학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특히 지방에는 더욱 그랬다. 전국적으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톨릭대 성모병원, 원광대병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등에 응급의학과가 개설되어 있었지만, 신생 과로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지만 정형외과 전문의였던 노성만은 전남대병원 제1대 응급실장을 한 경험도 있어 응급의학에 관한 관심이 많았다. 응급의학과를 만들려는 열정이 누구보다 강했다. 하지만 대충 학과만 개설해놓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 했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응급의학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혀놓고 싶었다. 써전이면서 흉부외과를 전공한 민용일이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사람으로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민용일은 신생아·소아 심장 수술 전문의가 되려는 꿈이 있었고, 응급의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스승의 제안이 있었던 터라 적잖은 고민이 시작됐다.

며칠을 고민한 뒤 그는 결심을 내렸다.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분야인 신생아 심장 수술을 포기할 수 없었다. 차라리 의사를 안 하면 안 했지 관심도 없는 응급의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전남대병원을 떠나 광주보훈병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보훈병원에서 신생아 심장 수술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세팅을 다 해준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노성만은 민용일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붙잡을 수 있는 조건을 붙여 그를 어떻게든 남게 하고 싶었다. 응급의학과를 개설하는 대신 흉부외과 겸직으로 발령을 내 신생아와 소아 심장 수술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었다. 노성만은 흉부외과 오봉석 교수에게 펠로우로 있던 민용일이 대학에 남아 응급의학과를 개설할 것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고는 19938월 민용일을 응급의학과 교수로 덜컥 발령을 냈다.

어쩔 수 없는, 반강제적인 선택이었지만 민용일은 심장수술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스승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국립대 병원에서는 전국 최초로 전남대병원에 응급의학과가 개설됐다.

낚시가 취미인 민용일 교수
낚시가 취미인 민용일 교수

 

전공의 모집해 본격적인 응급의학 수련 실시

 

민용일은 응급의학과를 개설한 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6개월 뒤인 19942월 허탁과 윤한덕을 레지던트로 첫 선발했다. 응급의학 교과목도 정규과목으로 바로 집어넣어 그해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다른 대학들은 응급의학과를 어렵게 개척해도 대학에서 강의를 주지 않아 할 수 없었지만, 전남대 의과대학에서는 달랐다. 노성만 원장이 원해 응급의학과를 만들었기 때문에 병원에서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국립대에서는 의과대학의 신생 교과목이 정규로 부여받기 무척 어려웠다. 그렇지만 노성만이 든든한 버팀목을 하고 있었고, 응급의학과 개설을 위해 교수 T/O부터 정식 교과목 인정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노성만 원장 다음으로 취임한 김신곤 원장(일반외과)도 미국에서 트레이닝을 할 때 응급의학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봤던 책이라며 민용일에게 응급의학 교과서를 선물까지 했었다. 전임과 후임 원장들의 응급의료에 관한 지대한 관심이 응급의학을 더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지만 민용일 혼자 응급의학과를 만들어 정식 궤도로 올려놓는 것은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대한응급의학회는 물론 다른 대학병원도 응급의학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교과서는 물론 마땅한 강의 자료도 구하지 못했다. 미국 책을 번역해 강의안을 만들어야만 했고, 처음부터 혼자 강의를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다.

민용일은 과를 운영한 경험도 없어 혼자 난감했다. 마침 전남대병원보다 36개월 먼저 학과를 만든 원광대병원을 찾아갔다. 민용일의 대학 선배 박재황 교수가 한강 이남에서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응급의학을 개척하고 있었다. 원광대병원은 레지던트도 뽑아 운영하며 어느 정도 틀을 구축하고 있었다.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가 개설되었을 때 유인술 전공의가 3년 차로 이미 수련을 받고 있을 때였다.

민용일은 원광대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평소 알고 지냈던 유인술에게 물었다.

응급의학 교과서도 있는가?”

약간은 비꼬는 말투였지만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 과를 운영하는 데 도움을 받고 싶었다.

네 선생님, 저희가 보고 있는 책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유인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민용일에게 알려주려고 했다.

우선 응급의학에 관한 유명 교과서 2권을 추천했다. Rosen's Emergency MedicineTintinalli's Emergency Medicine이었다. 이 책은 응급의학을 전공하는 전 세계 의사들의 필수 교과서로 응급의료 전반을 다룬 응급의학의 표준 교과서였다. 그 외 응급의학 외국 저널을 신청해 교과서와 병행하며 응급의학의 학문적 깊이를 채워나갔다.

레지던트였던 허탁과 윤한덕은 매일 아침 민용일과 함께 로젠(rosen) 교과서를 분담해서 읽으며 응급의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회 차원의 가이드라인도 없어 1990년대 중반까지는 대학별로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다. 어떻게 수련을 시킬 것인지에 대한 학회 차원의 지침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도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는 개설 이후 단 한 번도 레지던트가 없는 해가 없었을 정도로 위상이 올라갔다. 레지던트도 유독 많았고 논문도 많이 썼다. 위상이 높아지면서 전남대병원 응급실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환자가 몰려들었다. 학과 개설 다음 해인 1994년에만 21,700여 명이 응급실을 찾을 정도로 광주·전남 지역에서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의 역할은 갈수록 커졌다.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에 매년 레지던트들이 끊이지 않고 들어오자 민용일은 발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나가면 레지던트들의 트레이닝 자격이 없어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마음은 항상 신생아 심장수술에 쏠려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응급의학과에 몸이 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은 항상 떠날 자세가 되어 있었다. 민용일은 응급의학과 과장을 맡으며 흉부외과에서 신생아 수술도 3년 정도 이어갔다. 그러나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떠나고 싶었다.

민용일은 제자이자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 1기 전공의인 허탁에게 그러한 마음을 자주 내비쳤다.

네가 전문의를 따자마자 나는 나갈란다.”

실제로 1998년 허탁이 전문의를 취득하고 난 뒤 민용일은 허탁에게 응급의학과를 맡기고 광주기독병원으로 옮겨 신생아 심장수술에 전념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집안에 예기치 않은 큰 사건이 벌어졌다. 둘째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큰 형은 동생에게 대학병원에 남아 교수를 계속할 것을 권유해 민용일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민용일은 응급의학과에 쉽게 정을 붙이지 못했지만, 자라나는 제자들을 보며 그의 마음은 점점 응급의학과에 대한 애정으로 바뀌어갔다.

 

응급의학의 지역화 시동

 

1993년도 전남대병원에 응급의학과가 개설된 이후 인근 조선대병원과 전북대병원 등에도 응급의학과가 잇따라 문을 열었다. 지역에도 응급의학이 널리 알려지며 응급의학 지역화 시대의 서막이 피어올랐다. 지역 대학병원은 그때부터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며 응급의학 정착의 윤활유가 되어갔다.

전남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에서 1년간 펠로우를 했던 조석주 외과 전문의도 고향이 아닌 타향의 부산대병원으로 떠나 응급의학과를 새롭게 개척했다. 민용일으로부터 배운 응급의학 덕분이었다. 민용일은 응급의학과 개설 붐이 일면서 인근 대학에 강의안을 나누어주며 도움을 주었다.

인근 대학병원에 응급의학과가 잇따라 생겨나면서 응급의료를 더 활성화할 모임이 필요했다. 원광대병원 박재황 교수를 중심으로 대한응급의학회 호남지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은 박재황,총무는 민용일이 임명돼 응급의학 지역화가 공고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충청도는 물론 영남까지 포함한 한강 이남을 중심으로 응급의학의 지역화가 확장되며 세()가 불어났다. 영남과 호남, 충청을 포함하는 삼남응급의학회가 창설돼 이곳에서 민용일은 7~8년 동안 실무자로 일하며 응급의학의 지역화를 다져나갔다.

이 같은 영향 때문인지 19974월 지역 국립대에서는 처음으로 대한응급의학회 춘계학술대회가 전남대 의과대학 명학회관에서 열렸다. 짧은 기간에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의 위상이 학회 내에서 올라섰다는 증거였다. 김신곤 당시 전남대병원 원장이 응급의학과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것도 컸다. 신생 과로서 병원 내 위상은 물론 학술대회를 유치할 정도의 재정 여건도 부족했지만, 병원장이었던 김신곤의 도움으로 지역 국립대학에서 처음으로 학술대회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권역응급의료 협의체 만들어 응급의료정책 밑그림 그려

 

1997년 보건복지부는 전국을 15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지정하고 이들 센터를 중심으로 권역응급의료 협의체를 만들 계획이었다. 응급의료기관의 체계를 잡기 위한 협의체 성격의 모임이었으며 이곳에서 나온 의견을 응급의료정책에 반영할 생각이었다. 대학병원 병원장들이 협의체의 주최로 나섰다. 실무위원으로 권역응급의료센터장들이 함께 회의에 참석해 병원장들의 응급의료정책 결정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복지부는 국립대가 솔선수범해 인력과 자금 등을 권역응급의료센터 내에 충분히 지원하면 다른 일반 사립대학병원들도 덩달아 따라올 것으로 여겼다.

협의체는 우선 큰 틀을 잡고 다음으로 세부적인 논의를 통해 구체적인 권역응급의료센터를 건립할 계획이었다. 두 차례 병원장들을 주축으로 한 협의체가 열려 대학별 투자 범위와 규모 등 어느 정도 얼개가 추려졌다. 후속 세부적인 논의는 실무진들로도 가능했기 때문에 병원장들은 더 이상 협의체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협의체가 응급의료센터장들 위주로 꾸려지면서 실무 논의 자리로 바뀌었다. 병원장들이 큰 틀을 잡은 뒤 이후 세부적인 진행은 권역응급의료센터장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때 모임을 주도했던 권역응급의료센터장들은 인천길병원 이근 교수,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황성오 교수, 전남대병원 민용일 교수, 충남대병원 유인술 교수, 서울대병원 서길준 교수, 경북대병원 박정배 교수, 전북대병원 이재백 교수 등 7명이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대전 유성 아드리아 호텔에서 연구회를 열어 복지부 공무원들과 응급의료체계와 관련된 전반적인 정책들을 논의했다. 첫날은 공무원들과 함께 논의하고 다음 날부터 23일 동안에는 권역응급의료센터장만 모여 응급의료법과 관련한 기초를 만들었다. 유인술이 만든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협의체는 응급의료센터가 갖추어야 할 인력과 장비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일일이 만들었다.

응급의료센터 체계와 응급의료기관 평가를 위한 기초작업도 다져나갔다. 지금의 개정된 응급의료법의 태두였으며, 거의 근간이 같았다. 협의체 모임으로 응급의료가 점점 기틀을 다져나가게 되었다. 협의체가 대한민국 응급의료 발전의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이후 응급의료체계는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대한응급의학회가 초창기 학회를 만들고 전문의 과정을 만드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면, 협의체는 응급의학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협의체를 비난하는 말이 쏟아졌다. 일반 응급의료센터와 학회는 협의체 모임이 모든 게 권역응급의료센터 위주로만 돌아가고 있다며 없어져야 할 기구로 여겼다. 국립대학은 정부 지원 등으로 인력이나 장비 등을 맞추는 게 비교적 쉽지만, 일반 대학병원은 경영상 어려운 부분들이 많음에도 이 부분을 간과했다며 협의체에서 결정한 내용을 따르기 어렵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부는 미국, 일본과 같은 선진국 응급의료기관과 같은 엄격한 조건을 권역응급의료센터에 요구했다. 병원에서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고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일반 대학병원의 반대가 심했다. 이 때문에 권역응급의료센터로 지정됐지만 10년 동안 기준에 미달한 곳이 3/4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정부와 협의체는 당초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나중에는 오늘날의 응급의학이 발전하는데 협의체의 역할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기에 전남대병원도 2001년 광주권역응급의료센터를 개설해 지역의 응급환자 진료의 양적, 질적 수준의 향상을 가져왔다.

동물실험 중인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 의료진
동물실험 중인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 의료진

 

저체온 치료와 에크모를 응급의료에 도입

 

- 저체온 치료(hypothermia)

 

20051019일 토요일 오후, 민용일의 의과대학 1년 후배 이광용(가명)이 배드민턴 동호회에서 운동하다 쓰러져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다. 급성심근경색에 의한 심정지로 인한 심장 무수축(Asystole) 상태였다. 심장이 완전히 멈춰 몸 전체로 혈액공급이 멈춘 상황이었다.

심장 무수축이 되면 생존율이 2% 미만으로 낮아져 가장 위험하고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재빨리 대처하지 못하면 뇌사상태에 빠질 게 뻔했다.

민용일은 즉각 CPR(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20분 넘게 CPR을 하자 다행히 이광용의 심장이 미세하지만 뛰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은 돌아오지 못했다.

민용일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광용이 의식을 되살릴 수 있을까?’

민용일은 평소 급성심근경색 환자가 오면 CPR을 하고 심장이 돌아오면 보통 두 가지 방법으로 치료할 계획이었다. 먼저 저체온 치료로 뇌 소생 조건을 만들고, 다음으로 관상동맥 조영술로 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광용에게는 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과 저체온 치료 중 관상동맥 중재술을 먼저 하고 저체온 치료를 시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순환기내과와 협진으로 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로 막힌 심장을 뚫는 스텐트 하나만 우선 심기로 했다. 다행히 1시간 만에 마칠 수 있었고, 곧바로 저체온 치료에 들어갔다.

그는 흉부외과를 전공하면서 저체온 치료의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저체온 치료를 응급의료 환자에게 적용하면 환자 예후가 좋을 것으로 추측했다. 흉부외과 전문의로서 가장 먼저 응급의학과에 발을 디딘 그로서는 응급의료 분야에 저체온 치료방법을 도입하는 것이 좋은 치료방법이라고 여긴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급성심정지 환자에 대한 저체온 치료를 시도한다. 해보지도 않고 평생 식물인간 상태로 있는 것보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그 방법이 최선일 것 같았다. 그것은 아끼는 후배에 대한 선배의 인지상정이었다.

그러나 전남대병원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병원 응급의학과에서 저체온 치료를 시도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당시 응급의학 분야에 저체온 치료가 좋을 것으로 추측만 했을 뿐이지 권장하는 곳도 없었다. 더욱이 그때에는 저체온 기구도 없었을 때였다.

민용일은 이광용의 의식을 되살리기 위해 재래식 방법으로 저체온 치료방법을 생각했다. 전신에 걸쳐 저체온 치료를 하면 감염에 노출되기 쉽고, 출혈로 인한 합병증 등이 발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신이 아닌 머리만 선택적으로 택해 저체온 치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방법을 고민하던 중 민용일은 전공의들에게 주문했다.

키스모 비닐 4~5개를 준비해!”

전공의들은 키스모 비닐이 무엇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

비닐 튜브 말이야. 비닐 튜브에 얼음을 넣고 물을 섞어 흔들어라!”

그러고는 비닐에 담긴 얼음물을 이광용의 목덜미에 최대한 밀착해 붙였다. 얼음만 비닐 튜브에 넣으면 환자의 몸에 밀착되지 않았다. 물까지 넣어야만 얼음물이 피부에 바짝 붙을 수 있었다. 이광용의 목과 머리 부위 5곳을 이런 방식으로 전부 감쌌다.

며칠 후 이광용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평생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던 이광용의 GCS(Glasgow Coma Scale, 경계의식사정) 점수가 15점 가까이 올라왔다.

민용일의 가슴은 벅찼고 뛰었다. 후배 이광용이 살았다는 표시였다. GCS가 만점인 15점 가까이 올라오는 것은 의식이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 이제 제대로 살 수 있겠구나!’

며칠 후 그는 기적처럼 의식을 회복했다.

이광용도 내과 전공의 시절 CPR을 많이 해봤지만 큰 효과가 없었는데 저체온 치료와 함께 실시하니 그 효과가 확실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응급의학과가 다른 임상과와 다른 CPR을 보여준 것에 놀라울 뿐이었다.

민용일은 흉부외과에서 저체온 치료를 수없이 해봤다. 흉부외과에서는 저체온 치료가 일상화된 영역이었다. 심장 수술을 하면 저체온 상태로 수술한다. 머리 손상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체온을 떨어뜨리고, 심장과 폐를 멈춰놓고 치료하는 방식이다. 냉장고에 음식을 넣으면 상하지 않는 논리와 마찬가지였다. 체온을 낮춰주면 산소 소모량이 줄어들고, 장기의 기능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환자의 체온을 32도로 내려주거나 심지어 28도까지 낮춘 상태에서 수술하는 일도 있었다.

흉부외과에서 배운 걸 응용해 환자의 정신이 깨지 않을 경우 민용일은 머리를 차갑게 식혀 치료하면 의식도 정상으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저체온 치료를 응급의학에 처음으로 적용한 것이다.

지금은 이 치료법이 일반화되었지만, 그 당시 응급의학과에는 저체온 치료방법은 정식 치료 가이드라인이 아니었다.

지금은 전남대병원 응급실이 응급환자를 상대로 한 저체온 치료가 단연 앞서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흉부외과 전문의 출신 민용일 덕분이었다. 저체온 치료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아니었으면, 심정지 환자에게 하는 저체온 치료는 활성화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학문적인 성과까지 이끌어냈다. ‘심정지 저체온 치료를 연구하던 정경운 전남대병원 임상교수에게 병원의 연구비와 의국비 일부를 보조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물 46마리에게 선택적으로 저체온 치료를 시도해 그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연구였다. 연구 결과 저체온 치료를 한 동물과 안 한 동물의 치료 효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는 걸 입증했다. ‘심정지 저체온 치료가 심정지 환자 치료를 현저히 높일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보여주었다. 정경운의 이 논문은 민용일이 처음으로 지도한 박사 논문 1호였다.

 

- 체외막형 산소공급 보조장치(ECMO)

 

저체온 치료에서 성과를 본 민용일은 인공심폐기인 ECMO(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ion, 체외막형 산소공급 보조장치)도 응급실에 반드시 있어야 할 기구라 생각하고 재빨리 들여놓았다. 에크모는 환자의 심폐 기능이 정상적이지 않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심장이나 폐를 대신해 순환기 기능을 보조하기 위한 기계다.

심근경색으로 온 초응급환자에게 인공호흡은 한계가 있어 에크모를 통해 시간을 번다면 후속 치료가 원활히 이어질 수 있었다. 인체 바깥에서 인공으로 심장을 돌리면 자기 심장은 돌지 않지만, 환자의 세포는 썩지 않는다. 산소를 공급해주기 때문이다. 심장 수술을 할 때도 에크모를 걸어놓고 수술하듯, 응급실에 실려 온 심장질환 응급환자에게도 에크모를 걸 필요가 있었다.

보통 심정지가 4분 이상 지나면 뇌가 손상을 받기 시작한다. 민용일은 이를 막기 위해 호흡과 혈액순환을 원활히 할 방법을 재빠르게 모색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에크모를 돌리는 것이었다. 에크모를 빠르게 하면 할수록 예후가 좋았다. 특히 급성심근경색으로 오는 젊은 환자들에게는 에크모를 반드시 걸었다. 급사 우려를 최대한 막기 위해서였다. 에크모를 통해 심폐 기능을 원활하게 만들었다. 에크모를 걸면 일단 환자를 안정시키고 그 다음 순환기내과에서 관상동맥을 통한 스텐트 시술을 빠르게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응급의학과에서 실시하는 에크모는 흉부외과와 하는 방법이 약간 달랐다. 흉부외과에서처럼 흉부를 갈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바늘로 삽입해서 한다. 경피적 삽관술로 몸을 째지도 않고 한다. 그만큼 응급의학과에서 하는 에크모는 급하다는 의미였다. 숙련되지 않으면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응급환자에게 최대한 빨리 시도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그렇지만 에크모를 돌리기 위해서는 숙달된 전문인력이 필요했다. 혈관을 찾아 꽂는 팀과 기계를 작동할 준비를 하는 세팅팀, 심폐소생술팀, 이렇게 3팀이 있어야만 제대로 돌아간다. 에크모를 이용한 치료는 위급한 환자에게 시도하는 응급 중 최고의 응급이었다. 의료진이 숙달되거나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하지만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에서는 처음에는 숙달된 팀은커녕 그 개념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실습을 통한 개념 파악과 손에 익히는 반복된 훈련 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민용일은 응급의학과 수련의들을 팀으로 나누어 수없이 실습하고 공부했다.  응급의학과 단독으로 팀을 꾸려 에크모를 돌렸다. 이는 지금도 국내에서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가 유일하다.

 

지금은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가 에크모를 통한 환자 치료에서 전국 최고를 자랑한다. 2010년부터 심정지 환자를 상대로 에크모를 본격적으로 돌리기 시작해 현재는 180례 정도를 달성했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치다. 치료 사례도 많지만, 환자 상황에 따른 순발력도 뛰어났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심정지 환자가 있어 CPR을 시도하려 했다.

그런데 환자 차트를 보니 승모판막 협착증이 아닌가. 민용일은 이 증세가 있는 환자에게는 일반 CPR을 하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곧바로 에크모를 걸었다. 에크모를 통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뒤 수술해야만 했다. 수술실까지 옮겨 새롭게 에크모를 장착해 수술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민용일은 곧바로 흉부외과 오상기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승모판막 협착증 환자가 심정지 상태로 응급실에 왔는데, 수술기구 가지고 빨리 좀 내려와야겠는데. 응급실에서 곧바로 수술해야 할 것 같아!”

수술실까지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급한 상황이었다.

오상기는 민용일의 흉부외과 후배였다. 같은 과 선후배였기 때문에 응급의학과와 흉부외과 의료진 사이에는 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수술팀을 데리고 곧바로 응급실로 내려왔다. 그리고 에크모를 돌린 상태에서 심장을 열어 수술했다. 그때까지 개심술을 응급실에서 하는 사례는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전남대병원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응급실에서 벌어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에크모는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를 시작으로 보편화되면서 이제는 응급의학 분야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치료방법이 되었다.

 

최고를 꿈꾸며

 

민용일은 응급의학과를 만든 뒤에도 10년이나 방황했다. 응급의학과보다 흉부외과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응급의학과에서 더 보람을 찾는다.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가 진료, 교육, 연구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많은 성과를 달성했으며, 특히 저체온 치료와 에크모 등 응급의학 분야의 첨단 치료에 새로운 이정표를 썼기 때문이다.

민용일은 현재는 전남대병원 응급의학과에 대한 자부심을 누구보다 많이 느끼고 있다.

전공의 중 한 명의 낙오자가 없고, 제자들도 곳곳에 영역을 구축하고 있어 보람을 느낍니다. 전남대병원 응급실이 저체온 치료와 에크모의 메카라는 자부심이 있고, 전국 어느 응급의학과와 비교해 손색없이 실험실이 세팅되어 있는 것도 자랑스럽습니다. 정년까지 3년을 남겨두고 있는데, 그 해는 제가 응급의학을 시작한 지 만30년이 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응급의학과에서 반평생을 보낸 지금, 응급의학과 개설이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용일은 제자 중 특히 윤한덕 전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 제일 그립다고 덧붙였다. 2019년 설 명절 때 응급의료만을 생각하며 일만 하다 세상을 떠난 그가 무척 보고싶어진다고 했다. 누구보다 똑똑했고 대한민국 응급의료쳬계를 힘껏 끌어올린 사랑하는 제자 윤한덕을 그리워하며 말한다.
"내 사랑하는 제자, 우리 한덕이! 이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렴……."

민용일 교수 프로필

 

  • 학력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전남대학교 대학원 의학 석·박사

 

  • 경력

 

흉부외과 전문의 취득

일본 후쿠오카 소아병원 심장외과 연수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과장

광주권역응급의료정보센터 소장

전남대학교병원 기획조정실장

삼남응급의학회 회장

대한응급의학회 호남지회 회장

대한항공응급의료협회 초대회장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빛고을 전남대학교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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