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재난 대처 소홀 지적 논문…이후 대비훈련 열려
불안한 응급진료 행태 보고 매뉴얼 마련 등 개선 노력

백광제 건국대병원 교수
백광제 건국대병원 교수

 

환자 예단 않고 무조건 최선 다해 진료

 

1999년 초 어느 날 오후, 40대로 보이는 환자가 인하대병원 응급실로 의식을 잃은 채 실려 왔다. 교통사고로 가슴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상태였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했으며, 혈압은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목 정맥은 잔뜩 부풀어 올라 금방 터질 것처럼 팽팽했다.

인하대병원 응급의학과 백광제 교수는 청진기를 순간적으로 환자의 가슴에 재빨리 들이댔다. 심장 소리는 멀게만 느껴졌다. 경험상 심장이 터졌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 순간 숨을 가쁘게 내쉬던 환자가 갑자기 숨을 내쉬지 않았다. 순간적인 심정지 상황이었다. 진단 검사도 할 여유가 없었다.

심장이 으깨어졌고 심낭 속에 피가 고였구나! 그리고 심정지까지 왔으니

가슴을 열고 재빨리 심장 마사지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응급의학을 공부하기 이전에 흉부외과 전문의이었던 그의 감각적인 판단이었다.

옆에 있는 후배 의사에게 “가슴을 열고 심장 마사지를 해야 하니까 가족에게 바로 전달하고 승낙서를 받아!”라고 소리친 뒤 곧바로 가슴을 열어젖혔다.

백광제의 진단은 들어맞았다. 심장은 찢어져 있었고 그 속에서 피가 내뿜어졌다. 그는 찢어진 심장 부위를 재빨리 손으로 틀어막았다. 한 손으로는  손바닥으로 심장을 감싸고 심장 마사지를 했다.

 

교통사고가 나면서 몸이 압축되면서 심장이 심하게 눌렸던 모양이었다. 안전벨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차량이 충돌하면서 가슴을 심하게 누른 것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는 밖에서 아무리 CPR(심폐소생술)로 심장을 마사지해도 소용이 없었다. 터진 심장에서는 피가 솟구칠 것이고 외부에서 가하는 심폐소생술로는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은 뻔했다.  심장이 제 기능을 할수있도록 직접 심장 마사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열어젔힌 가슴 속으로 손을 넣고 심장을 마사지 하면서  수술실로 곧바로 뛰어 들어갔다. 밤이면 수술방이 열리지 않았겠지만, 오후 시간이라 무작정 밀고 들어갔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환자를 보자 마취과 교수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실에) 연락 안 했어?”

마취과 교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백광제에게 당황하듯 물었다.

그럴 시간이 없어. 급해. 지금 바로 (수술) 장갑 끼고 와. 급하다니까!”

찢어진 심장을 누르던 손이 백광제에서 마취과 의사로 순식간에 바뀌었고 곧바로 수술로 이어졌다. 환자가 조금 늦게 왔으면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한참 후 수술실에서 백광제에게 연락이 왔다. 사망했다는 통보였다. 그 말을 듣자 허탈했다. 위급한 환자를 지체하지도 않고 응급처치를 하면서 곧바로 수술실까지 밀고 들어갔는데. 아니 가슴이 아팠다. 그의 지극 정성 노력에도 끝내 환자가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괜히 쓸데없는 짓 했나?’

괜한 자책감이 들었다.

수술방까지 밀어붙이며 마지막 살릴 수 있는 찬스를 기대했는데 허망하게 무너졌다.

아니야. 이런 일을 내가 했었어야지! 내가 그런 조치를 안 했으면 환자가 살 수 있는 1%의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거야.’

그렇게 위로하고 스스로 안심시켰다.

응급실에 온 환자를 다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 치료를 시도한다면 죽을 수 있는 환자도 살릴 기회가 있다는 걸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응급의학과는 그런 초기 처지를 얼마나 잘하느냐, 환자를 안정시키냐, 그것이 환자 생명을 살리는 관건이었다. 그런 시도로 1~2명 더 살아난다면 의료에 대한 신뢰는 물론 응급의학과에 대한 믿음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소신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생존자가 늘면서 응급의학이 더 개선되고 발전이 될 것이다. 개인적 자책이 있었지만, 응급의학과 절차 과정으로 봤을 때 어떠한 시도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다. 그런 과정이 이어지면서 응급의학과의 발전과 학문적 발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광제의 생각은 그랬다.

환자가 어떻게 될지 미리 단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생각은 아니다. 단정은 하지 않아야 한다. 어차피 해도 죽을 거야,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해보지도 않고 나쁜 결과를 단정하는 것은 의사의 자세가 아니다.’

가끔 주말에 궁궐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백광제 교수(왼쪽)
가끔 주말에 궁궐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백광제 교수(왼쪽)

 

항상 불안한 응급진료개선 필요성 느껴

 

백광제가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1982년 의료계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전문 임상 과들도 분과가 나누어지지 않았고 응급의학과는 필요성에 대한 논의도 전혀 없었던 시절이었다. 병원마다 응급실은 있었지만, 응급실은 급한 환자들의 병원으로 들어오는 창구 또는 통로 정도에 불과했다. 응급실 내에 전문적인 치료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고, 응급실 진료는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인턴들의 차지였다. 응급실에 환자가 오면 인턴이 초진하고 필요하면 다른 과의 1년 차 전공의들이 응급실로 내려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백광제는 그런 형태의 응급진료를 항상 불안하게 생각했다.

그가 흉부외과 전공의 2년 차 때 배가 아파서 응급실에 왔던 환자가 초기 진료 중에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의 환자는 아니었지만 정확한 진단이 되기도 전에 사망한 환자라는 소문이 병원 내에 널리 퍼졌다.

백광제에게 이는 남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문제였고, 자신의 가족·친척들의 문제였다. 응급실의 초기 진료에 대한 중요성과 응급진료에 대한 개선점을 찾아서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은 의사로서 화두처럼깊숙이 자리 잡았다.

백광제는 흉부외과 전문의를 따고 종합병원의 흉부외과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응급실장을 병행했다. 그는 인턴 선생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들은 환자가 오면 X-ray 등 자세하고 정확한 진단검사를 먼저 하려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있었다. 일단 환자의 안정상태를 만드는 게 우선인데, 그렇지 않았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받은 교육이 그랬다. 응급실에는 이와 다를 필요가 있었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소생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진단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응급의학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였기 때문이다. 정확한 진단도 중요하지만, 환자의 상태에 따른 신속한 처치가 중요한 치료방법이었다.

백광제는 응급실에 온 환자를 위한 매뉴얼이 필요했다. 기초적인 것들을 담아 인턴들의 응급실 근무 매뉴얼을 만들고 인턴들에 대한 교육이 시급했다. 매뉴얼에 환자가 응급실에 왔을 때 검사부터 하지 말고 심각한 경우 혈압이 높으면 수액처리를 어떻게 하고 X-ray는 팔다리보다는 가슴이나 경추를 먼저 찍고 혈압이 안정되면 다른 곳을 찍으라고 지시했다. 처음부터 모든 검사를 다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주지시켰다. 초보적이었지만 환자가 오면 검사와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지침서를 작성하고 이를 교육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병원뿐 아니라 응급의학 전체 차원의 체계적인 응급의료에 대한 교육 필요성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건국대병원 전문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있고 있는 백광제 교수
건국대병원 전문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있고 있는 백광제 교수

 

응급의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발견

 

백광제는 1991년 여름, 응급의학과 관련한 모임이 미국에서 있다는 걸 들었다. 그는 선진국에서 응급의학에 관해 조금이나마 더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응급의료에 관한 학술 발표를 듣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응급의료 치료방법을 더 배우려는 생각만 있었다. 참가신청서를 작성해 우편으로 미국에 보내고 그해 가을 미국으로 떠난다.

행사가 열린 미국 보스턴에 도착한 그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가 경험한 놀라운 일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곳 행사는 단순한 응급의학 관련 모임이 아니라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학회였다. 백광제는 미국에 응급의학과 전문의 제도가 있는지도 몰랐다. 학회 행사 규모도 엄청났다. 응급의학 전문의와 관계자들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행사였다. 이 행사에 참여한 한국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학술대회에는 많은 세션이 있었다. 그렇게 분야별로 세션이 많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당시까지 백광제가 참석했던 우리나라 학회들은 단일 과목이나 장기에 대한 발표만을 주로 하는 학회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본 것은 여러 임상 과가 아니라 단일 학회, 즉 응급의학만 전문으로 하는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것이 그를 놀라게 했다.

백광제는 아침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교실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학문을 익혔다. 전부 새로운 내용이었다. 이런 걸 한 번도 배우지 않고 의사가 됐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새로운 경험과 흥미로운 강의에 흠뻑 빠져 미국 응급의학과 의사들에게 응급실 운영을 물어보고 다녔다.

미국 응급의학 학회가 끝나고 귀국해 알아보니까 우리나라에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없었지만, 영동 세브란스병원에 응급의학과가 개설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영동 세브란스병원에 찾아가고 싶었다. 어느 날 영동 세브란스병원에 응급의학과를 처음으로 만들었던 이한식 교수 연구실을 약속도 없이 무작정 찾아가 궁금한 것을 대뜸 물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리라병원에 있는 흉부외과 과장 백광제라고 합니다. 응급의학에 관심이 많아 교수님께 궁금한 부분을 여쭤보기 위해 사전에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이한식도 반가웠다.

응급의학을 널리 알리고 응급의학 전문의 제도를 만들려는 그의 계획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이한식은 1991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영동 세브란스병원에 응급의학과를 개설한 응급의료 개척의 선구자였다.

백광제는 제일 궁금했던 치료 범위에 관해 이한식에게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응급의학 의사가 환자를 어디까지 봐야 합니까?”

백광제는 흉부외과 의사였다. 흉부외과 환자가 오면 수술하고 퇴원까지 돌보는 정확한 치료 범위가 있었지만, 응급실에 환자가 오면 환자를 보는 시간이 언제까지이며,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한식은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급의학은 응급실에서부터 환자를 보는 개념이 아니고 현장에서부터 환자를 본다는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응급의학과는 외래에서부터 치료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부터 환자에게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백광제는 기존 임상 과와 달리 응급의학과는 환자의 구조부터 주요 임상 과에 넘길 때까지 환자를 응급조치해야 한다는 개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영동 세브란스병원을 나서는 순간 그는 응급의학과라는 새로운 길이 있음을 알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있는 길이었구나! 나도 한 번 발을 담궈야겠네.’

새로운 길이 있을 것 같다는 희망과 기쁨이 교차하며 연구실을 나섰다.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풀렸다.

그의 친구들이 의과대학에서 조교수를 할 때 백광제는 다시 고려대 응급의학과의 펠로우로 1993년 새롭게 도전을 시작한다. 그 길이 비록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헬스 트레이너이기도 한 백광제 교수

 

대량재난 관련 논문으로 재난훈련의 필요성 제기

 

백광제가 펠로우로 응급의학을 시작할 때에는 각종 대형사고가 쏟아졌다. 그러나 큰 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처치하고 대량재난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개념도 없었다.

고려대 응급의학과 홍윤식 교수는 펠로우를 하고 있던 백광제에게 대량재난에 관한 대처 방법 등에 대한 분석을 요청한다. 그러나 백광제는 난감했다. 대량재난을 분석하려면 선행연구는 물론 제대로 된 분석 틀이 있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환자가 발생했을 때 분류 방법이나, 분류에 따른 후송방법, 후송병원 결정 등이 학문적으로나 매뉴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대량재난이 발생했을 때 환자 상태에 따라 분류하거나 병원의 크기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신속하게 구조만 한다는 개념만 있었다. 이 같은 엉터리 구조 방법으로 인해 구조 때 환자들의 허리는 꺾여 하반신이 마비되거나 목뼈가 부러져 사망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대형 재난 발생 때 사고현장에서의 부상자 구조·응급처치에 계획적이고 효율적인 재난의료체계가 아예 없어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든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백광제는 우리나라 재난의학적 처치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19933월 부산 구포역 열차 전복사고 때 구조 우선순위에 대한 고려 없이 시급한 치료가 필요한 중상자보다 단지 거동이 불편한 경상자가 먼저 구출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사고 당일 현장 부근 병원에 후송된 66명 중에는 이미 사망한 30구의 시신이 포함돼 있었다. 사망자 후송에 많은 시간을 소비해 상대적으로 부상자 후송에 소홀했다는 걸 지적한 논문이었다.

우리나라의 재난의료체계가 군·경 및 자원봉사자들이 우선 동원돼 민방위형(Civil Defense Mode) 방식으로 이루어져 문제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는 비전문인의 무작정 구조가 오히려 환자에게 불리할 수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꼬집은 것이다. 척추손상 환자를 옮길 때 목이나 척추 부위를 제대로 고정하지 않은 채 그냥 업거나 끌고 나와 하반신마비 등 회복 불가능한 후유증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논문에서 민방위형 구조방식은 환자를 병원에 옮기는 데에만 치중해 실제 생명이 위태로운 응급환자에게 현장이나 후송 중에 필수적인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법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백광제는 우리나라에는 선행연구가 없어 외국 논문을 사례로 들었다. 응급의료시스템을 재난의료시스템으로 전환시켜 현장에서 환자를 정확하게 분류해 치료가 필요한 사람을 적절한 병원에 순서에 맞추어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환자의 분류·응급처치·후송지시가 응급의학 전문의나 잘 교육받은 응급구조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재난의료체계가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대량재난에 대비한 훈련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후 대량재난훈련은 아주대병원과 원주 세브란스병원 등에서 열리며 대량재난 훈련의 기반을 다지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건국대병원
건국대병원

 

인하대병원 응급의학과 개척 보람 느껴

 

1996년 인하대병원에 응급의학과가 신설되면서 백광제는 김준식 교수와 둘이서 응급의학과를 개척한다. 응급의학과가 전문 임상 과였지만, 전문의도 없고 전공의 지원자들 역시 없는 상황이었다. 함께 일할 사람은 없었지만, 응급의학과를 멋있게 만들고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은 다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병원 응급실을 둘이서 지키다 보니까 이틀에 한 번 저녁에 잠깐 집에서 잠만 자고 다음 날 새벽에 출근하는 일이 많았다. 주말에도 격주로 이틀간 일한 뒤 월요일까지 근무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힘들지 않았다. 다른 과 교수들이나 원장도 보기에 걱정이 되어 다른 과에서 가끔 응급실 환자 진료를 해줄테니 쉬라는 말로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없어도 운영되는 응급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변과 병원에 확실하게 심어주고 싶었다. 일부러 고생을 선택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응급실에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자부심으로 느껴졌다.

이후 응급의학과 전공의 제도가 생겼는데도 인하대병원 응급의학과에는 5~6년 정도 지원자가 거의 없었다. 그때까지 응급의학과가 활성화되지 않았다. 2002~2003년도에 겨우 지원자가 생겨날 정도였다.

백광제는 쉬지 않고 일을 했지만 행복했다. 힘들어도 다이내믹해서 계속 심장이 뛰고 있었고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응급의학의 틀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이 기뻤다. 근무시간이 보통 36시간을 넘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그것은 일에 대한 자부심과 성취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하대병원 응급실을 개척한 백광제는 9년간 머물다 2005년 지금의 건국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건국대병원 응급의학과도 새롭게 생겨나면서 그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는 건국대병원에서도 응급의학과 의사가 없는 응급실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응급실에는 응급의학과 의사가 있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인하대병원 응급의학과를 세팅하면서 가지고 있는 원칙이었다.

할리데이비슨을 몰고 있는 백광제 교수
할리데이비슨을 몰고 있는 백광제 교수

 

환자의 편안한 임종 돕는 죽음학 공부

 

백광제는 의사로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지키는 걸 소명처럼 안고 살아왔다. 다른 임상 과보다 응급의학과가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던 중에도 마주쳐야 하는 게 환자들의 사망이다. 그는 생로병사중에서 임종 과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고 느껴졌다. 환자의 임종을 자주 접할 수밖에 없는 응급의학 전문의로서 임종 과정의 소중함을 알고 싶었다. 임종 과정의 환자들에게 편안하고 행복한 임종을 맡게 해드리는 것도 의사의 중요한 책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호스피스 공부를 시작한다.

호스피스 공부를 하다 보니 죽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공부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9년부터는 죽음학 교육을 받고 죽음 교육지도자가 되었다. 죽음학을 공부하던 중에 깊이 있는 죽음 교육지도자가 되기 위해 철학적,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해 올해는 사이버 대학의 인문 철학 과정에 편입해 다시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젊은 시절의 공부와는 조금 다르지만, 인생의 후반부에는 더 좋은 삶과 죽음에 관한 공부를 해서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 싶다는 꿈이 생겨났다.

죽음학에서 죽음은 상실 중 하나로 봅니다. 자기 몸을 상실하는 것이 가장 큰 상실이죠. 사람은 살아가면서 조금씩 발전하고 자기 인생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죽음은 자기 인생을 더 좋게 만들고 완성해가는 마지막 과정입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오복(五福) 중에 죽을 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학은 잘 사는 것을 다루는 과정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도 중요한데, 의사로서 이제 환자들이 잘 돌아가시게 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취미생활 중 하나인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백광제 교수
취미생활 중 하나인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백광제 교수

 

다양한 취미활동으로 스트레스 풀어야 진료도 원활

 

백광제는 응급의학과 의사는 다른 과와 달리 스트레스가 많다고 생각한다. 응급의학과는 응급현장을 항상 지켜야 하고 병실을 돌아다니지 못하고 응급실에만 근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이 있으면 밤낮과 휴일, 명절에도 자리를 지켜야 한다. 남들이 놀 때 일해야 하고, 일할 때 노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일하면서 취미를 갖고 스트레스를 풀어야만 제대로 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여긴다. 취미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와 고민을 벗어나가기를 바란다. 그는 2017년 대한응급의학회 회장을 할 때 학회에 응급의학과 의사의 취미생활이라는 세션을 만들어 회원들의 취미생활을 권장했다. 학회가 새로운 학문을 배우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회원들의 친목과 생활의 즐거움을 위한 시간도 만들어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이 작용했다. 이 세션에서는 이종격투기, 오토바이, 축구, 자전거, 한옥 건립 등 회원들의 취미생활이 6~7개 발표됐다. 그 또한 취미가 많았지만, 학회장이라는 감투 때문에 발표하지는 못했다.

그는 현재 취미생활로 스쿠버다이빙과 헬스를 즐겨 하고 있다. 스쿠버다이빙 트레이너, 헬스 트레이너가 될 정도로 전문가이기도 하다. 지금은 오토바이를 처분했지만, 할리데이비슨을 몰며 세계 곳곳을 누비기도 한 오토바이 마니아다. 또 주말에는 궁궐문화해설사로 변신해 우리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적당한 생활을 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취미를 가지는 게 좋습니다. 그게 환자에게도 좋은 의사입니다. 취미를 갖는다는 건, 내가 필요한 자리에 있을 때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지름길인 것 같습니다.”

2022년 정년퇴직하는 백광제는 은퇴 이후 할 수 있는 것이 많을 것 같다. 일단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궁궐해설사를 하고 싶다. 또 환자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호스피스 활동도 열심히 할 계획이다.   흉부외과와 응급의학과를 하면서 자신이 보던 환자의 죽음들이 내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은퇴 이후 사람들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데 작은 기여라도 하고 싶은 게 백광제의 희망이다.

그는 응급의학과 후배 의사와 제자들에게 내 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다리라고 말한다. 환자가 있으면 가장 먼저 뛰어가는 다리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입이다. 환자를 안심시키고 의사를 잘 따라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하는 입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의학적 지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의학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광제 교수 프로필

 

학력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대학원 석·박사

 

경력

고려대학교 의료원 인턴, 전문의

의료법인 리라병원 흉부외과 과장(응급실장 겸임)

고려대학교 의료원 응급센터 전임의

대한응급의학회 법제이사

Schoold of Medicine, UCSD, CA, USA. visiting scholor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건국대 응급의학과 교수

대한응급의학회 감사

대한응급의학회 부회장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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