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노인 응급 등 세부화된 전문분야 활성화 기틀 마련
예방가능사망률 연구논문 계기로 응급의료기금 대폭 확충

복부와 얼굴에 철근이 박힌 사나이

1995년 경기도 한 건설현장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가 추락하면서 현장에 있던 철근이 그대로 이 사람의 오른쪽 옆구리에 들이박혔다. 성인 남자 손가락 한 개 정도의 두께와 사람 키 정도 되는 길이의 철근이 인부의 오른쪽 옆구리부터 몸 한가운데를 지나 왼쪽 얼굴까지 관통했다. 철근은 50센티미터 정도 인부의 몸속에 단단히 틀어박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인부는 급히 인근 아주대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검사결과 철근이 폐를 뚫었지만, 다행히 혈관과 심장은 건드리지 않았다. 만약 심장과 혈관을 찔렀다면 현장에서 즉사했겠지만,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한줄기 살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것 같았다.

아주대병원 응급의학과 임상강사로 근무하던 김준식은 조준필 교수와 함께 환자의 상태를 보자 치료가 쉽지 않음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남자의 몸에 박힌 철근을 빼기가 쉽지 않았고, 섣불리 잘못 빼다가 오히려 피가 쏟아져 사망할 우려가 컸다. 할 수 없이 몸 밖에 박혀 있는 철근을 자르는 것만이 최선의 응급조치 방법이었다. 나머지 몸속에 박혀 있는 철근은 수술실에서 복부와 흉부 수술을 통해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단 외부로 튀어나온 철근을 자르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응급처방이었다.

직원에게 재빨리 그라인더를 구해오라고 지시한 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바깥에 튀어나온 철근을 자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불똥이 튈 것이고, 그라인더로 철근을 갈아내면 열로 뜨거워지면서 온몸에 화상을 입힐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결하나? 김준식은 철근을 자르는 동안 불똥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물을 뿌리면서 철근을 자르고, 바닥에는 물로 흠뻑 적신 거즈를 잔뜩 펼쳐놓았다. 물을 뿌리면서 그라인더로 몸 밖에 삐져나온 철근을 잘라나갔다. 윙윙거리며 커다란 굉음을 울리며 돌아가는 그라인더 소리가 응급실 전체에 울려 퍼져 다른 환자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고, 병원이 공사장인처럼 착각할 정도였다.

김준식은 몸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철근을 응급실에서 그대로 잘라냈다. 이제는 수술로 몸속에 단단히 박혀 있는 철근을 제거할 차례였다. 수술하기 전에 흉관삽입술을 하고 기관절개술로 기도를 확보한 뒤에 수술실로 옮겼다. 수술실에는 흉부외과, 외과, 성형외과 전문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곧바로 협동 수술에 들어가 인부의 몸속에 박힌 철근을 뽑아내는 대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이후 환자의 상태는 크게 호전됐고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신속히 응급 처치를 한 김준식은 환자가 살아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응급의학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몸소 느꼈다. 응급실과 응급센터에서 근무하는 것 외에 환자에게 최상의 진료, 종합적인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전문의는 응급의학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응급실로 실려 왔을 때 응급의학과가 아니었다면 과연 살아날 수 있었을까?’

김준식은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응급의학을 배우지 않았다면 그 환자를 어떻게 처치했을까?

외과는 환자의 장기를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만 생각할 테고, 흉부외과는 폐만을, 성형외과는 성형만을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다. 응급의학과이기 때문에 전체를 보고 어떻게 환자를 치료할 것인지 순간적인 판단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환자는 당시 KBS-2TV에서 인기리에 반영되고 있었던 긴급출동 119’ 프로그램에 철심 박인 사나이로 소개되기도 했다.

김준식은 응급의학만이 초기 통합치료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수술 이후 김준식의 외상 환자에 관한 생각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외과를 전공한 그는 외상학회에 참석도 하고 학회 활동을 하면서 외상외과 세부전문의도 따냈다. 그랬던 그에게 응급의학과는 다른 과를 도와줄 수 있는 과라고 느껴졌고, 응급의학이 더 세분화된 전문분야로 점점 더 확장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았다.

 

소아 응급, 노인 응급 등 세부 분야 확장에 기여

김준식은 응급의학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응급의학만을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세부 분야로 영역을 더 넓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응급의학 전문의들이 능력을 더 펼칠 수 있는 분야로 영역을 넓혀나가야 응급의학의 발전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예를 들어 소아 응급의학, 노인 응급의학, 스포츠 응급의학, 임상중독 등의 분야로 응급의학 관련 폭을 넓혀야 한다고 봤다. 응급의학과를 넘어 응용 학문을 통해 다른 과를 도와주면서 응급의학과의 발전을 꾀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나름대로 응급의학 아이덴티티(identity)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초창기 응급의학은 대부분 외과 출신 전문의 위주로 움직였다. 외과와 응급의학의 영역이 비슷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급의학은 외과뿐 아니라 심장질환, 뇌졸중 등 내과적 질환도 잘 다루는 전문의가 같이 응급환자의 치료를 맡으면 좋겠다는 것이 김준식의 생각이었다. 많은 내과 전문의들이 응급의학 전문의로 들어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응급의학이란 소아와 노인까지 분야가 광범위한데 실제로 대한응급의학회에서는 그 부분에 큰 관심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 때문에 소아 응급과 노인 응급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걸 구상하게 된다.

이를 위한 가장 첫 단계로 소아 응급환자를 전문적으로 볼 수 있는 전문의를 육성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단순한 응급의학보다는 범위를 좀 더 세분화해 소아 응급환자가 왔을 때 소아 분야 응급의학 전문의가 바로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평소 소신이었다. 곧바로 실천에 들어갔다. 인하대 의과대학 출신으로 소아과 전문의를 딴 한승백 선생이 그 대상이었다. 1997년 한승백은 인하대병원에서 소아청소년과 임상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준식이 1996년 인하대병원 응급의학과를 개설한 뒤 응급의학의 발전을 위해 하나씩 활동 범위를 넓혀가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한승백도 인하대병원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인하대병원으로 옮긴 뒤 16개월이 넘긴 1997년 말, 김준식은 응급의학과 백광제 교수와 상의 후 한승백에게 응급의학과로 전과를 권유한다. 김준식은 그 말을 꺼낸다는 게 처음은 힘들었다. 응급의학이라는 학문이 자리를 잡지 않아 앞날도 보장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괜히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까 우려가 앞섰다. 그렇지만, 미래의 응급의학을 위해 그는 한승백에게 제안한다.

한승백 선생님! 앞으로 응급의학과에서 소아와 관련된 부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소아과 전문의를 취득하셨지만, 응급의학과에서 같이 일하면서 소아 응급환자들을 보면 좋겠는데 어떻습니까?”

김준식의 제안에 한승백은 머뭇거렸다.

글쎄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한승백은 당시 신생과였던 응급의학에 관심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답변을 미뤘다.

그러나 그 답변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준식의 제안을 한승백이 흔쾌히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소아 응급의학 분야를 개척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대한응급의학회에서 소아과 전문의로서 응급의학과로 전직하려는 시도는 한승백이 처음이었다.

한승백이 응급의학으로 전과를 결심했을 때 김준식은 그에게 말했다.

규정상 전문의가 다시 수련의 과정을 밟으려면 응급의학 3년 차로 들어와 2년 동안 응급의학 레지던트로 수련을 해야 합니다.”

,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응급의료를 활성화한다는 의미로 소아 응급 분야를 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이후 인하대병원에 소아응급연구회가 만들어졌다. 서울대병원 의사들의 참여도 이어져 소아과와 응급의학 전문의들이 함께 2008년 소아응급연구회를 만들었고 나중에 대한소아응급의학회로 발전한다.

 

노인 응급의학도 소아 응급의학과 마찬가지로 응급의학의 세부 분야 중 하나다.

김준식은 응급실에 노인 환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그들의 특성에 따른 응급처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노인 응급의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인들은 신체상 젊은 사람과 다른 부분이 있어 그들과 똑같이 약을 쓰는 것은 문제가 있고, 이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세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대한임상노인의학회에 물어봤다.

노인과 관련한 질환과 치료에 관심이 많습니다. 노인의학에 대해 배우면서 같이 일하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요?”

, 들어오셔서 함께 일해보시죠.”

대한임상노인의학회의 대답은 흔쾌했다.

대한임상노인의학회에 가입한 김준식은 학회 활동을 하며 노인 환자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마침 왕순주 교수(현 한림대동탄성심병원)도 노인에 대한 관심이 많아 함께 힘을 모을 수 있었고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인구가 고령화 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어 응급실에 오는 노인환자들에 대한 치료에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을 서로 알아차린 것이다.

 

대한임상독성학회 만들어 주도적으로 활동

김준식이 1994년 아주대병원에 임상교수로 있을 때 응급실을 찾는 중독환자가 꽤 많았다. 아주대병원이 있는 수원은 번화한 도시가 아니었다. 인근 화성 등은 농촌 지역이었고, 이곳 일대에서 산나물이나 제초제 등을 복용한 환자가 자주 있었다. 응급실에 있으면서 그는 중독환자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같이 임상강사로 근무하던 김성중 선생과 함께 농림부, 농촌진흥청에서 소개한 약물에 대한 책자를 보면서 이 분야를 공부했다. 이후 1996년 인하대병원으로 옮긴 그는 농촌 지역과 섬 지역이 많은 인천 중구 지역에서 농약 중독과 제초제 중독환자, 산에서 야생식물 섭취 후 중독환자, 수면제, 마약 등의 약물중독환자가 응급실에 오는 일이 많은 걸 봤다. 인천 지역 농촌과 섬 지역에 있는 중독환자들이 병원 응급실에 많이 내원하고 있었고 수원보다 오히려 약물중독환자가 더 많았다. 외국에는 응급의학과에서 중독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많이 있었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렇지 않았다. 응급실에 오는 약물중독환자를 보면서 빨리 처치를 하면 좋겠는데 우리는 약물중독센터가 없었다.

그러던 중 친구인 노형근 인하대병원 호흡기 내과 교수를 만나 약물중독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노형근은 연세대를 졸업한 뒤 스웨덴 카롤렌스카 대학에서 약물약동학 등을 공부해 약물과 관련한 박사를 딴 그 분야 베테랑이다.

어느 날 노형근은 김준식에게 갑자기 이렇게 제안한다.

김 교수! 같이 중독환자를 보면 어떻겠나?”

~그래, 좋지!”

중독환자가 오면 응급실에서 김준식이 환자를 응급처치한 뒤 호흡기 내과로 입원시키면 노형근이 세부적으로 치료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의기투합으로 인천에서 최초로 인하대병원에 중독센터를 만들어 운영에 들어갔다. 이후 김준식은 노형근, 김승호 연세대 의대 교수, 정구영 이화여대 의대 교수, 서길준 서울대 의대 교수 등과 함께 대한임상독성학회를 창립해 독극물에 관해 연구하고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있는 공부 자리를 마련했다. 학회는 점점 안정화되면서 응급의학과 의사들만이 아니라 기초의학 연구자와 내과, 소아과, 정신과, 신경과, 산업의학 등의 임상 연구자와 산업계, 법학, 재난사회학,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김준식은 대한임상독성학회 이사장과 회장을 역임했고 그 뒤를 이어 노형근이 이사장과 회장을 맡아 학회를 발전시켰다. 현재는 인제대학교 일산백병원 김경환 교수가 회장을 맡아서 학회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앞으로 학회는 독극물뿐 아니라 도핑 관련 분야로 연구를 확대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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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가능사망률 연구논문 발표로 응급의료 발전에 큰 획 그어

전전년도 교통 범칙금의 20퍼센트를 응급의료기금으로 만들어 지원

전공의에게 매달 50만 원씩 지원금도 지급해 응급의료 발전 계기 마련

2001년 응급의료 발전에 커다란 획을 긋는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예방가능사망률이라는 연구결과가 대한민국에 널리 알려졌다. 응급실에서 사망하지 않을 확률이 어느 정도인가를 파악하는 국내 첫 논문이었다. 예방할 수 있는 사망, 즉 응급실에 왔을 때 무엇을 해줬으면, 무엇을 더 빨리해주면 살았을 것을 예측하는 확률과 관련된 것이었다. 선진국 연구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응급진료 개선에 관한 연구로 응급진료를 개선하고자 한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정구영 이대목동병원 교수와 김윤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김준식 등이 같이 연구를 진행했다.

199711일부터 2년간 3차 병원 2개소와 2차 병원 4곳의 응급의료센터에서 사망한 외상 환자 중 사망원인을 판단할 수 있었던 131명을 조사한 결과 예방 가능한 외상 사망률은 50.4퍼센트로 나타났다. 그중 완전 예방 가능한 경우는 33.6퍼센트로 2/3를 차지했다. 2차 병원의 예방 가능한 외상 사망률은 55.8퍼센트로 3차 병원의 40.0퍼센트에 비해서 높게 나타났다. 예방가능사망률이 전체적으로 50퍼센트를 넘었다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죽는 사람이 10명 중 5명이라는 말이다. ‘예방 가능한 사망=억울한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다른 선진국은 20퍼센트 수준이었다. 물론 조사항목 자체가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부분도 있어 비현실적인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수치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어서 연구자인 김준식에게도 충격이었다.

연구를 의뢰했던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 팀장은 응급환자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의료기관에서,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하는 시스템을 만들 계획이었다. 응급환자들이 병원을 옮겨 다니다가 골든타임을 놓쳐 소중한 생명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연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결과 발표 이후 시민들은 응급실에 가는 걸 꺼려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응급실에 가면 절반이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이 대한민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것이다. 보건복지부와 국회는 대응방안 마련에 부심했다. 응급실에서 진료의 문제점으로 시설, 장비, 인력에 대한 전면적인 개선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걸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예산이 필요했지만, 당시의 응급의료기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예산을 확충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대한응급의학회 임원과 보건복지부 관계자 등이 부지런히 뛰어 예산을 확보해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김준식에게도 대한응급의학회로부터 미션을 받았다. 국회를 수시로 찾아가 응급의료기금을 늘리는 것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국회의원을 설득해 기금을 확충하는 임무였다. 그는 대한응급의학회 임원진들과 함께 부지런히 국회를 찾아다녔다. 새 구두의 밑바닥이 다 닳을 정도로 뛰어다녔다. 당시 학회 회장과 이사장 및 임원진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대가는 그 빛을 발했다. 응급의료기금이 대폭 확충되면서 인력, 장비 지원이 크게 늘었다.

전전년도 교통 범칙금의 20퍼센트가 재원으로 만들어져 20~30억에 불과했던 응급의료기금이 2003400억 원으로 확충됐다. 응급환자 치료를 제대로 하라는 차원에서 국회가 기금을 크게 늘린 것이다. 그때부터 현장의 응급의료가 활발하게 돌아갔다.

기금과 더불어 응급의학에 종사하는 인력 지원도 이어졌다. 응급의학과는 근무여건이 열악해 수련생들이 지원을 기피하는 대표적인 과였다. 그렇다고 환자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 분야인 응급의학 전문의를 양성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쓰러지고 있는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육성은 의료계는 물론 정부의 시급한 과제였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육성하기 위해 전국에 있는 응급의학과 전공의에게 매달 50만 원씩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도 그때 만들어졌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응급의학과가 수련생들 사이에서 인기과로 발돋움했다.

정부는 응급의학 전문인력을 확보하고자 2003년부터 응급의료 전공의 수련보조수당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병원을 개원하기도 어렵고 수련하기도 힘든 전문과목에는 지원하지 않으려는 전공의의 지원 기피 현상을 완화하려는 취지로, 응급의료기금에서 수련보조 수당으로 월 50만 원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출처 : 인하대학교병원
출처 : 인하대학교병원

인하대 응급의학과 개설

199512월경 김준식은 신촌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이한식 교수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이한식은 김준식의 연세대 의과대학 선배였고, 김준식이 외과 레지던트를 할 때 이한식은 응급의학과 교수로 있었다.

잠깐 만날까?”

,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요?”

내년에 인하대병원이 오픈하는데, 네가 가서 세팅 좀 해라.”

저는 지금 아주대병원에 있는데요. 일단 조준필 교수와 상의 좀 해보겠습니다.”

김준식은 아주대 의과대학 응급의학 과장인 조준필 교수와 의논을 한 뒤, 인하대병원 응급실을 만드는 창립 멤버로 참여한다.

인하대 창설자인 조중훈 회장은 인하대병원을 만들 계획이었다. 그는 주치의인 신촌세브란스 강진경 교수(소화기 내과)에게 병원에 필요한 의료진 세팅을 부탁했다. 강진경은 연세대 후배인 이한식에게 응급의학과를 만들 수 있는 의료책임자를 선정해줄 걸 요구했고, 이한식은 김준식을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추천한 것이다.

19963월 인하대병원 내부에는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원광대 의과대학 출신 이재규 선생과 김준식은 세팅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이재규는 그해 2월 말부터 응급실에 필요한 자료와 운영내규 등을 만들고 있었다. 이후 김준식, 이재규는 밤잠을 줄이면서 응급실 운영에 필요한 자료와 규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하대 의과대학 응급의학교실 T/O가 잘못되는 바람에 이재규는 교수로 정식 발령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스마트하고 열심히 일한 이재규와 같이 근무하지 못한 김준식은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1996527일 비가 오는 가운데 인하대병원이 개원식을 했고, 이후부터 김준식은 응급의학과를 정상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여정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전공의도 없이 외부에서 긴급 수혈을 받아 응급실을 유지해나갔다. 그는 성남 인하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에 있었던 안성태, 이용주 선생과 교대로 근무하며 응급의학의 명맥을 이어갔다. 이후 19968월 건국대 민중병원 응급의학과 백광제 교수를 영입하면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전공의가 없는 상태에서 둘이서 교대로 24~36시간씩 응급실을 지켰다. 1997년 말에 인하대병원 소아청소년과 임상강사였던 한승백 선생을 설득해 1998년 인하대병원 응급의학과 3년 차로 수련을 시작하면서 응급의학과는 서서히 궤도에 올라왔다.

김준식은 20142월 국제성모병원 진료부원장으로 근무를 시작하면서 응급의학과도 개설했고, 그해 9월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 병원장으로 취임한다. 그가 아주대병원과 인하대병원, 국제성모병원 응급의학과 오픈에 모두 관여하면서 주위 사람들은 농담 삼아 그를 병따개란 의미의 오프너로 부르기도 했다.

김준식 가톨릭관동대학교 의료원장 겸 의무부총장은 현재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2,000명이 넘는다. 따라서 앞으로 5~6년 후에는 3,000명이 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활동하게 될 것이다의료에서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많이 늘어나기 때문에 우리 학회 전문의들은 환자에게 필요한 분야가 어디일지를 좀 더 생각해 보고 응급의학 분야를 더 확장하는 게 바람직할 것 같다고 말했다.

 

김준식 의료원장 프로필

- 학력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건국대 대학원 의학석사

고려대 의학박사

- 경력사항

서울기독병원 외과 과장

인하대 의과대학 조교수, 부교수, 교수

인하대병원 응급실장

인하대병원 제2진료부원장

대한임상노인의학회 부회장

대한임상독성학회 이사장

대한임상독성학회 회장

대한응급의학회 부회장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가톨릭관동대학교 의과대학 국제성모병원장

가톨릭관동대학교 특임부총장

가톨릭관동대 의과대학 응급의학교실 교수()

가톨릭관동대 의무부총장 겸 가톨릭관동대의료원 의료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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