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응급의학 교수들과 교류 통해 대한민국 응급의료 발전에 기여
삼남응급의학회 설립 등 학회 내 소모임 기틀 마련했다는 평가 받아

백령도에서 수술 뒤 사라진 환자

1979년에는 응급의학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응급의학 전문의도 없었으며, 환자가 오면 외과 의사가 감당했다. 경북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 고려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외과 전문의가 된 정제명은 그해 4월 장교로 임관돼 백령도에서 의무중대장 겸 의무참모로 군대 생활을 막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사로서 그때가 가장 보람 있는 시기였다.

보통 수술을 하게 되면 마취과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백령도에는 상황이 열악해 외과 의사인 정제명이 혼자 마취도 하고 수술도 도맡았다. 백령도에 군인들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거주하고 있었지만, 병원은 백령 적십자병원 한 곳이었고 이곳 운영 책임자였던 정제명 외에는 의사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병사는 물론 이곳 주민들의 생사(生死)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백령도는 날씨가 나쁘면 고립되었고, 의료장비도 빈약했으며, 의료인력도 간호사로 있는 수녀 1명과 간호보조원 약간명이 전부였다. 기상이 나빠 배가 들어올 수 없어 육지로 환자를 이송할 수 없을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정제명은 위급한 환자를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해 치료했다. 그러나 환자의 치료 결과만큼은 아무도 몰랐다.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날씨가 나빠져 육지에서 마취과 의사가 오지 못하면 직접 전화해 척추 마취를 한 뒤 치료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정제명이 백령도에 온 지도 4개월이 될 무렵, 한여름의 태양이 병원 막사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오후 2시경 대청도에 사는 50대 농부가 백령 적십자병원으로 급하게 실려 왔다. 나뭇단을 내리는 작업을 하다 묶어진 나무가 한꺼번에 풀려 무너져 내리면서 날카로운 낫이 농부의 복부를 그대로 찔렀다. 농부의 배가 부풀 대로 부풀어 올라 복강 내에 피가 가득 찬 것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혈압도 잡히지 않았다.

정제명은 순간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사망 선언을 할까? 아니야! 이대로 죽었다고 선언하면 너무 아까워.’

마지막까지 최선의 노력도 다해보지도 않고 생명의 끈을 버린 채 사망 선언을 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제명은 농부의 복부를 재빠르게 십자 모양으로 갈랐다. 배를 가르자 쌓여 있는 피와 뒤섞인 끈끈한 액체가 콸콸 흘러내렸다. 마취도 하지 않았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선홍색 핏빛은 하얀 시트를 순식간에 붉게 물들였고, 이내 정제명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복부에 잔뜩 고여 있는 피를 뽑아야 했지만, 흡인기로 뽑기에는 너무 양이 많았다. 손으로 직접 피를 퍼내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손으로 복부에 가득 차 있는 피를 마구 퍼냈다. 핏물과 소독액이 뒤섞인 비린내가 수술실에 가득했다. 피를 퍼내다 정제명은 잘린 혈관을 찾아냈다. 금방 찾은 것이 다행이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잘린 혈관을 재빨리 묶었다. 더 이상 피는 쏟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복벽을 닫을 일만 남았다. 복벽을 닫으면서 피부를 꿰매자, 그제야 농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제 살았다. 살 희망이 있구나!’

정제명은 기뻤다. 환자가 움직인다는 것은 살았다는 신호였다.

산소를 꽂을 수 있는 곳은 모두 꽂도록 했고, 한쪽에서는 방송으로 헌혈을 요청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수액을 맞은 뒤 농부는 서서히 회복해갔다. 일주일 이상 지나 실밥을 다 뽑고 이제는 퇴원 절차만 남은 상태였다.

그러나 농부가 갑자기 사라졌다.

정제명은 왜 사라졌을까?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지다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치료했는데. 왜 갔을까?”

말도 없이 몰래 떠난 농부가 너무 야속했다.

치료비 때문이 아니었다. 백령도에서는 민간인에게도 치료비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부도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라진 것이다. 정제명은 이유도 모른 채 안타까웠다.

1979년 백령도 의무중대장으로 근무할 시절
1979년 백령도 의무중대장으로 근무할 시절

최선을 다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백령도와 인근 도서인 대청도, 소청도는 해병대 제6여단의 지휘관인 흑룡부대장 여모 장군이 관할하고 있었다. 정제명은 부대장인 여 장군에게 속상한 듯 말했다.

장군님! 환자 중 아예 죽을뻔했던 사람을 살려냈는데, 그분이 낫자마자 사라졌습니다. 굉장히 황당합니다.”

, 정 대위. 그 사람 야속하게 생각하지 마라!”

?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사람이 자네의 고마움을 왜 모르겠나?”

정제명은 여 장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다면, 인사라도 하고 떠났어야지. 정제명의 생각은 그랬다.

하지만 이어 하는 여 장군의 말에 정제명은 수긍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자네가 너무도 고마운 생명의 은인이지만, 보답할 방법은 없고 얼굴을 보면 미안할 것 같아서 그냥 몰래 갔을 거야!”

정제명은 그제야 그럴 수 있겠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생 선배인 부대장에게 한 수 배운 것이다. 부대장은 백령도의 사정을 뻔히 잘 알고 있었다. 시골의 순박한 농부로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줬는데, 가난 때문에 별로 줄 것도 없고 해서 사라진 것을 간파한 것이다.

정제명은 여느 의사와 같이 어떤 환자가 오든지,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별의별 시도를 다 했다. 환자의 생명에 대한 집착이 누구보다 더 강한 편이었다. 이러한 집착과 열정으로 인해 기적 같은 일들이 자주 있었다. 정제명이 막 백령도에 군의관으로 발령받은 뒤 수술한 환자 한 명도 기억 속에서 생생하다.

젊은 직업 군인인 하사였는데 신혼여행을 갔다 온 뒤 십이지장궤양 천공으로 복막염까지 온 상태였다. 응급수술을 위해 육지로 후송이 필요했지만, 날씨가 나빠 이송할 수 없었다. 그대로 있으면 복막염이 진행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제명은 환자의 상태를 보자마자 전신마취가 필요함을 느꼈지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육지였다면 마취과 의사가 전신마취를 했을 것인데, 이곳은 그렇지 못해 할 수 없이 국소마취를 한 채 수술을 감행했다. 국소마취 뒤 치료를 시작하자 마취가 덜 된 하사의 몸 일부가 심하게 아파왔고, 고통을 참지 못한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지면서 몸을 마구 움직였다. 정제명은 간호사에게 진정제와 진통제를 투여하도록 지시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환자는 고통으로 계속 몸을 뒤척였고 급기야 장이 밖으로 기어나왔다. 장이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정제명은 어떻게 손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오로지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하느님! 기적을 일으켜주소서. 제가 너무 욕심이 심해 자만에 빠졌나 봅니다. 제발 요번만 살려주세요.”

정제명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했다. 신의 가호(加護)만을 기다리는 방법 외에는 달리 손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기적이 일어났다. 서서히 하사의 장이 제 자리로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간절한 기도를 신이 응답한 것이다. 복막만 닫으면 수술은 끝이었다. 무사히 수술을 마친 뒤 후속 치료를 위해 하사를 육지로 후송만 하면 완치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상이 악화돼 열흘 뒤에서야 서울로 후송했다.

서울 해군병원에서 하사 수술 부위를 본 외과 과장이 말했다.

누가 마취도 없이 이렇게 촘촘히 수술했지? 10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무런 탈이 없어. 대단하네!”

하사의 생환을 기적이라고 본 것이다.

정제명은 백령도에 1년 동안 있으면서 총상, 폭발사고, 위궤양, 복막염, 급성충수염, 십이지장 천공 등 다양한 질병의 환자를 경험했다. 육지에서는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의료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백령도에서는 변변찮은 의료장비로 환자를 치료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상황에서 그에게 기적 같은 일들이 가끔 일어났다. 특히 백령도에서 경험한 굵직한 두 사건의 해결 과정을 잊지 못했고, 그것이 인생의 길잡이가 되었다. 후일 응급의학으로 전과하게 된 토대가 되기도 했다.

환자 치료 과정에서 정제명은 깨달았다.

기적은 없다. 다만, 남들이 기적으로 볼 뿐이다. 최선을 다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니들이 정화수를 떠놓고 소원을 비는 것처럼 환자를 정성으로 치료하면 기적이 찾아올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모든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 치료하려고 노력했다.

정제명은 3년간의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1982년부터 서울 고려병원(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외과에 근무했다. 근무 중 외과 공부를 체계적으로 더 하기 위해 1984년 미국 마운트 시나이 병원과 스론 캐터린 암센터로 연수를 떠나 대장항문외과, 유방암, 갑상선 수술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그리고는 대망의 부푼 꿈을 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였는지, 그를 질투하는 선배들의 등쌀이 시작됐다.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정제명이 못마땅해 스스로 나가도록 일종의 압력을 가한 것이다.

정제명은 사람들에게 실망해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서울 고려병원을 떠날 생각이었다.

1984년 미국연수 시절
1984년 미국연수 시절

Choice(선택), Change(변화), Chance(기회)

정제명과 그의 아내는 서울 고려병원에서 수련 도중 만났다. 정제명은 외과, 아내는 소아과를 각각 전공했다. 정제명이 서울 고려병원을 떠나기로 한 이상 아내도 그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져 함께 마산고려병원(지금의 삼성창원병원)으로 내려갔다.

마산(지금의 창원)에 내려간 정제명은 밀려드는 환자로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서울에서는 수술도 많이 못 해 실력을 향상할 수 없었을 것인데, 여기에서는 지도를 잘 해주는 좋은 선생님들이 있어 배우는 것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수술 경험이 많아지면서 자신감도 얻었다. 외과 치료 대회를 연다면 메달권에 들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쳐났다. 종합병원이 거의 없는 경남 전 지역에서 이곳으로 환자가 몰려들었지만, 거뜬히 치료했다. 경험이 많아진 데다가 환자 중 한 명도 죽어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정제명은 삶은 선택의 연속이며 이를 기회로 만들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 ‘Choice(선택)’를 하면 그것에 대한 후회보다는 스스로 좋은 ‘Change(변화)’를 통해 ‘Chance(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생이 ‘B(Birth)’에서 ‘D(Death)’로 가는 것이 아니라 ‘B(Birth)’에서 ‘D(Dream)’로 간다고 생각했다. 죽음도 꿈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정제명은 이전 직장 상사가 자신을 내쫓으려 한 것을 원망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기회로 승화시켰다. 그것은 자기발전의 과정이었고 새로운 성장의 계기였다.

그는 항상 환자들에게 친절한 의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미국 연수 도중 의사가 환자들에게 베푸는 서비스 정신을 배운 것이다. 미국은 치료비는 많이 받지만, 의사가 환자에게 대하는 태도는 친절하고 자상했다. 정제명은 미국에서 배운 환자 대하는 방식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했다.

예를 들어 어려운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 되면 가족 모두를 불러 자신의 방에서 한꺼번에 설명했다.

암이 있어서 수술해야 하는데, 수술 이후 100% 완치를 장담할 순 없습니다. 저도 수술하기 전까지는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고 다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며 환자 치료 경과를 자세히 설명하며 최대한 알려줬다.

더 질문할 것 있습니까?”

의사로서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미국에서 배운 것이다.

가정이 편하고 행복해야 한다

마산고려병원의 2년은 정제명에게 수술 실력의 커다란 향상을 가져왔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공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 한편에는 허전한 마음도 있었다.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연구하고 싶었다. 그때 또 한 번의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그의 희망대로 1987년 한림대학교의료원 외과 교수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정제명은 마산고려병원에 있는 아내를 두고 혼자만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향도 아닌 곳에 따로 떨어져 있는 아내가 안쓰러워 서울에서 개업하기를 바랐지만, 아내의 생각은 단호했다. 서울에서 같이 개업하지 않으면 올라가지 않겠다는 것. 정제명은 2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림대 교수를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아내를 올라오게 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아내와 아이들과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는 건 쉽지 않았다.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경기도 성남에서 아내와 한 건물에 나란히 개업했다.

정제명은 항문외과, 아내는 소아과로 개업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대학교수로 있을 때와 달리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사소한 일에도 아내와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인생은 잘 됐다고 기뻐하고, 잘못됐다고 절대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 가정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고도의 스트레스와 계속된 과로로 심장에 이상이 생겨 급기야 병원에 입원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제명에게 회의가 밀려들었다. 인생이 행복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게 뭔가? 가정이 편하고 행복해야 하는데…….

그 길로 곧바로 정제명은 외과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병으로 입원한 아내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소아과에서 대역으로 환자 치료에 나섰다. 소아과에는 환자가 하루에 몇백 명씩 몰려왔다. 아내의 고생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이대로 일하다가는 자신도 과로로 쓰러질 것 같았다. 밀려드는 환자도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만두기로 한 외과를 할 수도 없었다. 마침 그때 서울 고려병원에서 응급실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응급의학이 따로 없는 상태에서 외과 전문의가 응급의학을 하기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정제명은 이전 서울 고려병원에 있을 때 외과에서는 서운하게 떠났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응급실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정제명은 응급의학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1994년 또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인요한 박사와 한컷
인요한 박사와 한컷

인연

정제명은 대한민국 응급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외국인으로 세브란스병원 인요한 박사와 미국 응급의학 전문의 제프리 아놀드(Jeffrey Arnold) 박사를 꼽는다.

인요한은 조선조 말에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의 후예로 세브란스병원 외국인 진료소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도 유창했다. 전남 순천에서 결핵병원 사업과 선교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숨지는 바람에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의 개선을 위해 현대화된 구급차를 설계하고 보급했다.

아놀드는 미국 비버리힐스에 있는 시다스 시나이 병원(Cedars-Sinai Hospital)에서 응급의학을 전공한 전문의이자 교수였다. 그는 미술 대학을 나온 뒤 버클리, 스탠퍼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인 부인을 얻을 정도로 한국과 인연이 깊었으며, 우리나라의 응급의료 발전에도 기여를 많이 한 인물이다.

정제명은 아놀드를 통해 국제응급의학회 의사들을 자주 만났고, 이들을 통해 대한민국 응급의료 발전에 앞장섰다.

미국에서 응급의학을 배운 정제명은 귀국해 서울 고려병원 응급실에서 제대로 된 응급의료를 하고 싶었지만, 병원이 삼성으로 넘어가면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대신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마침 한림대 강동성심병원에서 응급의학과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정제명에게 교수직을 제안한다. 1988년 한림대학 외과를 떠났던 그가 6년 만에 한림대로 다시 돌아와 이제는 외과가 아니라 응급의학과를 새롭게 구축할 교수로 채용된 것이다.

정제명은 아내 희망대로 개업을 위해 한림대 병원 외과를 떠났지만, 또다시 그를 채용해준 한림대학이 고마웠다. 그 보답은 응급실에 밤늦게까지 있으면서 주인처럼 일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응급실에 밤늦게까지 대기하고 있으면 인턴들과 간호사들도 든든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정제명은 전공의도 없이 인턴들과 함께 응급실을 꾸려나가면서 한림대 강동성심병원의 응급의학을 서서히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간호사와 젊은 인턴들에게만 응급실을 맡기지 않고 경험이 있는 제가 응급실을 지키자고 생각했죠.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윗사람에게 연락해주자는 게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한림대에 응급의학과를 만들며 학회 활동도 병행하게 됐죠.”

정제명은 1994년 한림대 강동성심병원에 응급의학과를 만들며 본격적으로 응급의학 연구와 응급의료 발전에 뛰어든다. 다양한 해외 인맥을 활용한 미국 응급구조사 초청 구급대원 대상 CPR 교육 등은 실무자들의 구조구급 술기 익히기에 도움이 되었고, 이 교육은 강동소방서를 비롯한 서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일반인이 알아야 할 응급처치에 대한 교육도 기획하고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대한응급의학회 대내외교육위원회 이사로 활동하며 일반인에게 필요한 응급처치의 내용을 선정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홍보해 응급의료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한 그는 인요한과 아놀드, 짐 할리만(미국), 이시이(Ischi, 일본 고베 대학) 등을 학회에 소개하며 연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들 선진국 응급의학 교수들은 우리나라 응급의료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고, 오늘날 대한응급의학회가 의료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병원 전 제대로 된 처치는 정제명에게 중요한 응급의료 중 하나였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 초기 응급조치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2001년 미국응급구조사의 소개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한국 BTLS(Basic Trauma Life Support, 기본외상소생술) 한국 지부를 설립하고 우선 응급의학 전문의들을 대상으로 교육했다. 2002년 삼성서울병원 이중의 교수와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대비한 BTLS 워크숍을 경북대병원 응급의료센터에서 열어 외상 응급환자의 현장 조치의 중요성을 알렸다. 한국 BTLS는 향후 일본 BTLS 창립에도 기여하는 등 아시아 국가들이 응급의료체계의 기틀을 만들 수 있도록 선도하는 역할을 해나갔다.

이후 정제명은 소방대원의 외상환자 접촉 빈도가 높음에도 외상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 서울소방학교에서 열린 교실을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골든아워 내 적정한 외상처치 및 소생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정제명은 향후 각 소방학교 교관 교육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전 소방대원을 대상으로 외상 교육을 할 계획이다. 나아가 일반인과 경찰, 군인 등으로 확대해 최초 외상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외상 교육을 할 예정이다.

히말라야에 서 있는 정제명 교수
히말라야에 서 있는 정제명 교수

오지 의학

응급의학에서는 실제 술기가 중요하지만, 이론만 아는 사람이 많았다. 정제명은 응급의학과 의사는 이론은 물론 실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재빠르게 응급조치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응급환자를 다루는 응급의학 의사들의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경험이 전제되지 않는 이론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했다.

1990년대 후반, 정제명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놀드의 결혼식에 초대되어 갔다. 아놀드의 아버지는 조각가, 어머니는 정원사로 일하며 환갑의 나이에 유럽 알프스를 다녀올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정제명에게 아놀드 부모의 알프스 여행은 대단한 모험으로 여겨졌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를 계기로 알프스에 버금가는 동양의 최고의 명산 히말라야 등정을 꿈꾼다.

꿈은 사소한 일의 실천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정제명은 히말라야에 가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했다.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체력 강화가 우선이었다. 다음으로 의사로서 체험할 수 있는 고산병, 저체온증, 저산소증 등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히말라야 등정을 꿈으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책을 하나 번역할 계획이었다. 제목은 히말라야 가는 길, 부제는 고산병 대처법이었다.

이후 꿈을 꾸면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의 효과처럼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KBS1999년도에 밀레니엄 특집으로 엄홍길 산악대장과 히말라야 등정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를 들은 정제명은 자신은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등정했던 산악인에게 고산병 등의 체험을 듣고 싶었다. 응급실이 바빠 갈 수는 없을지라도 고산병 관련 자료를 건네주기 위해 KBS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안녕하세요. 한림대 응급의학과 정제명 교수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제가 고산병 관련 자료가 있는데 이것을 줄 테니까 참조하시고, 등정했던 분들이 돌아오면 인터뷰 좀 할 수 있나요?”

? 당연하죠. 그런데 교수님! 그러지 마시고 혹시 같이 가실 수 있습니까?”

정제명은 뜻밖의 제안을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제가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일단 병원에 이야기를 해보겠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제명은 히말라야를 가고 싶었지만, 병원 사정상 갈 수 없었다. 원장과 부원장에게 이야기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잘못해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 동안 응급실을 비워두는 것도 찬성할 수 없었다. 정제명도 예상한 대답이었다. 좋은 기회가 왔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병원 행정부장이 정제명을 찾아왔다.

교수님, 히말라야 가시고 싶으세요?”

네 정말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원장님과 부원장님께 말씀드렸는데 허락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사장님에게 직접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행정부장은 등산을 좋아했고, 히말라야 고산병 등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정제명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엄홍길 원정대의 팀 닥터로 그토록 꿈에 그리던 히말라야 제3의 봉우리인 칸첸중가(8,586미터)를 가게 된 정제명은 7,000~8,000미터의 설산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다. 베이스캠프까지 가면서 설산과 함께 사는 주민들의 생활상을 볼 기회도 있는 것 또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숨진 주민들을 불 속에 태우는 것을 보면서 정제명은 또 한 번 삶을 되돌아봤다. 숱하게 봉사활동을 한 그였지만, 오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오히려 배운 게 더 많았던 것이다.

히말라야 등정을 통해 등산할 때 일어나는 사고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올라갈 때만 생각하지, 내려갈 때를 생각하지 않는다. 내려가는 일까지 다 생각하고 산을 올라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걸 터득한 것이다. 무작정 높이 올라가려고만 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인생도 등산과 비슷했다.

고산병을 대처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몸을 적응시켜야지, 단칼에 되는 것이 아니었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Slow, Slow(천천히, 천천히)’가 생활화되어 있다. 등산을 급하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몸은 적응을 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고산병도 예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고산병을 통해 의사들이 배울 교훈이 있습니다. 고산병을 극복하기 위해 서서히 몸을 적응시키는 것처럼 환자의 신체 경과를 서서히 관찰하면서 치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의료는 그렇지 않습니다. 검사에 중독이 돼 결과가 안 나오면 의사들이 처음부터 처지를 아예 안 하려 합니다. 그것이 문제죠. 응급의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만을 꼭 알려주고 싶습니다. 응급의료를 전공한 의사는 단지 당직만 서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연구하고 대처하고 예방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여행을 많이 해 다양한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제명은 경험 등을 바탕으로 한 오지 의학포켓닥터를 대구응급의료정보센터에서 만들었다. 오지에 갔을 때 주위 환경을 이용해 치료하는 방법 등을 적어놓은 것이다. 그가 만든 포켓닥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갑작스런 사고는 예고 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평상시에 최선을 다해 대비해야 합니다.

삼남응급의학회 결성
삼남응급의학회 결성

학회 내 소모임 기틀 마련

응급의학을 시작했던 초창기에는 응급의학과 교수들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정제명은 응급의학에 대한 학문적 공유를 확산하고 제자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일종의 지회인 소모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학회 내 소모임의 기틀을 마련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제명은 한림대 강동성심병원에 응급의학과를 만든 뒤 아주대병원 조준필 교수, 단국대병원 송화식 교수 등과 함께 아주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강의하고 제자들을 위해 교육했다. 응급의학과 교수들의 모임 활성화는 물론 응급의학을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원주세브란스 병원도 참여했다. 전공의에게 발표하도록 하고 응급의학이라는 학문을 소모임을 통해 더 활발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자리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던 중 고향인 대구의 경북대병원에서 교수직 제안이 왔다. 당시 대구에 거주했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병치레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장남인 정제명은 모른척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정은 쉽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봐도 견해가 반반으로 갈렸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상황에서 멀리서 바라볼 수만은 없어 모교인 경북대병원으로 2001년 내려갈 결심을 한다.

경북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정제명은 병원의 발전은 물론 응급의학회 회원들의 활발한 교류를 위해 삼남응급의학회를 만든다. 창립 행사도 대구 비슬산 아래에서 가졌다. 박재황 교수(원광대), 민용일 교수(전남대), 유인술 교수(충남대) 등이 참여한 가운데 호남, 영남, 충청을 한데 묶는 모임이었다. 충남대와 전남대, 전북대, 조선대, 원광대, 부산대, 경북대, 영남대 등을 중심으로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응급의학의 발전을 위한 소모임이었다. 인요한과 아놀드, 이시이 등 평소 인연이 있던 사람들을 초청해 강의도 들으면서 충청과 영·호남 만이 아닌 드넓은 세계로 응급의학 전문의들의 교류를 확장해나갔다.

정제명은 응급의학이 사회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경북대에서 재직할 때 대구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 대구 세계육상경기대회,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대구에서 열린 세계소방관대회 등은 그들만의 축제가 아니었다. 그 장()을 통해 그동안 성장한 대구의 선진화된 응급의료시스템을 알리고 동시에 시민들에게 도움을 줄 또 하나의 기회였다.

또 마침 발생한 대구 지하철 사건 때 환자를 신속하게 치료하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경북대병원은 물론 응급의학과의 위상을 올려놨다. 일본에 사는 교포는 지하철 사건 때 대처를 잘해줘 고맙다는 편지를 정제명에게 보냈으며, 외신에서도 호평이 이어졌다. 외신기자들이 사건은 후진국형 사건인데, 경북대병원의 대처는 잘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정제명은 각종 세계 대회와 대형 사건사고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현장 체험의 중요함을 알았고, 세계 선진국 응급의학회의 교류가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응급의학회의 국제적인 모임을 주도하고 인생의 부침(浮沈)이 많은 사람만이 아는 노하우였다.

서울소방학교 사무실에 걸려 있는 좌우명인 '세심' 앞에서 선 정제명 교수
서울소방학교 사무실에 걸려 있는 좌우명인 '세심' 앞에서 선 정제명 교수

세심(洗心)

정제명의 좌우명은 세심(洗心)’이다. 우리 몸을 매일 씻는 것처럼 마음을 자주 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백령도에서 한 일들이 남들이 보면 기적이었지만,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면 바라는 일이 대부분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기적 같은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정성 덕분이었다.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정성을 다해 돌보는 것처럼 의사들의 환자 보는 것도 똑같았다. 정제명은 환자가 의사를 잘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성을 다하는 의사를 만나는 걸 행운으로 여긴다. 그는 응급환자를 대하는 마음도 항상 세심의 자세로 임하며 최선을 다해 치료했다.

그랬던 그에게도 시험이 닥쳤다.

2005년 친구들과 함께 서울 남한산성 등산 중 갑자기 통나무 넘어지듯 쓰러졌다.

경북대병원에서 MRI를 찍은 정제명은 옆에 서 있던 방사선과 전공 교수에게 농담 삼아 물었다.

머리에 혹 있나?”

있습니다. 선생님.”

정제명은 깜짝 놀랐다. 뇌종양이었다. 그토록 건강을 자신했던 그였지만, 뇌종양이라는 말은 충격이었다. 정제명은 자신이 근무하는 경북대병원에서는 수술하고 싶지 않아 다른 적합한 병원을 찾았다. VIP 증후군(의사가 유명인이나 지인을 치료할 때 특별하게 신경을 써서 치료하려다 오히려 실수가 발생하는 현상)을 우려한 것이다. 도와주는 사람이 제대로 못 할 것 같았다.

정제명은 한림대 강동성심병원에서 근무할 때 수간호사가 그와 같은 뇌기저부에 혹이 있었는데, 수술 후 멀쩡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인요한 선생에게 연락해 당시 수술한 의사를 찾아 12시간의 대수술을 감행했다. 다행히 악성이 아니었지만, 인공 뼈를 심었다.

수술 후 정제명은 앞으로 일을 않고 쉬어야 할지, 아니면 세상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쉬는 것보다 건강을 조심하면서 여생을 더 열심히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열정적인 성격이 그를 편하게 세상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수술 후 아무 후유증 없이 회복된 것은 아마 응급환자를 위해 남아 있는 일을 완수하라고 신이 그에게 준 계시 같았다.

서울소방학교
서울소방학교

아래로 임하소서

정제명은 살아오면서 여러 번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외과 수련, 응급의학과로의 전과, 귀향이 그것이다. 그는 선택했을 때마다 후회보다는 스스로 변화할 기회가 되었음을 감사했다. 지금까지 주어진 선택을 기회로 활용했고, 결국 그 자신도 좋은 방향으로 변화했다.

2015년 경북대병원을 정년 퇴임한 그에게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왔다. 공무원연금을 받으면서 편하게 살아갈까, 다른 보람된 일을 찾을까, 고민했다. 결론은 보람된 일을 찾기로 했고, 곧바로 서울소방학교 구조구급교육센터 지도교수로 들어간다. 직급은 계약직인 지방의무사무관.

아래로 임하기 위해 이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경북대 의대 교수에다 대구권역응급의료센터장, 경북대병원 응급의학과 과장,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등을 지낸 그를 바라본 주위의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돈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이곳에 취업한 순간, 공무원연금이 나오지 않는다. 제대로 된 응급의료를 구조구급대원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한 마음이 정제명을 서울소방학교로 이끌었다. 그는 5년째 서울소방학교 지도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올해 2년을 더 연장해 2022년까지 근무한다.

그가 서울소방학교에서 맡은 일은 응급의학 교육지도 및 운영 응급의료관련 연구 및 의료자문 구급분야 전문교육과정 교육 기타 주요 교육지도 등이다.

그는 지금 생활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평생 전공했던 응급의료를 구급대원과 일반 시민에게 알려준다는 걸 새로운 즐거움으로 여긴다.

제 나이에 얼마나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습니까? 이제는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좋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가 더 올라갔으면 혹시 어떻게 됐을 줄 모르죠. 과거를 회상하면 (더 높이 올라갈 기회도 있었는데) 하지 않아 아쉬운 건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소박한 꿈이지만, 애들도 다 결혼시키고 이제는 아내가 골프를 좀 더 잘 쳤으면 좋겠습니다. 또 건강을 유지하면서 언제든지 부르면 나올 수 있는 진정한 친구 2~3명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

구급대원들의 구급훈련을 지켜보고 있는 정제명 교수
구급대원들의 구급훈련을 지켜보고 있는 정제명 교수

정제명 전 경북대 의과대학 교수

- 학력사항

1967년 경북사대부고졸

1974년 경북대 의대졸

1988년 중앙대 대학원졸

1999년 의학박사(경북대)

 

- 경력사항

1982~1986년 서울고려병원·마산삼성병원 외과 과장

1987~1988년 한림대 의대 외과학교실 교수

1988~1994년 정제명 외과의원 원장

1994년 한림대 의대 응급의학과학교실 교수

2001년 경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응급의학교실 교수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의무전문위원장

2011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선수촌 병원장

2011~2015년 경북대병원 권역응급센터 과장

2011~2015년 대구경북권역 1339 응급의료정보센터 소장

2012~2013년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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