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의학과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역할”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위원으로 활동하며 응급의료분쟁 지침 만드는 중

홍윤식 전 고려대 의과대학 교수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사무실에서 활짝 웃고 있다.
홍윤식 전 고려대 의과대학 교수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사무실에서 활짝 웃고 있다.

1993년 겨울, 서울에 몰아친 강추위로 한강 물은 꽁꽁 얼어붙었고 날씨는 차가웠다. 하지만 강추위에도 서울 용산구 이촌동 대한의학회 건물에서 열린 의학회 임원회의의 열기는 뜨거웠다. 응급의학을 전문과목으로 인정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대한응급의학회 고시위원회 이사였던 홍윤식을 비롯한 학회 임원진은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홍윤식을 비롯한 이사장 김세경, 학술이사 이한식 등 학회 임원 3~4명은 대한의학회에서 다른 10개 학회 이사장을 비롯한 임원진들과 단판을 벌여야 했다. 40대였던 홍윤식은 의학회 대선배들에게 응급의학의 중요성을 알려 전문과목으로 관철시키는 것이 그날 최대 미션이었다.

홍윤식은 응급의학의 필요성, 자신이 알고 있는 미국, 독일, 일본 응급의료체계 등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지금 우리나라 응급실은 인턴이 끌고 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의술을 배워야 할 수련의가 모든 걸 도맡아 처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교수들은 손을 놓고 인턴에게만 응급환자를 맡기고 있습니다. 응급실을 지금처럼 인턴이 끌고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체계가 없고,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대형사고를 볼 때 응급의학은 더욱 필요한 학문입니다. 응급의학과는 임원님들이 우려하시는 것과 달리 다른 과들의 일을 빼앗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다른 과의 일을 전문화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응급처치만 하고 전문처치는 해당 과에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홍윤식은 이렇게 주장하며 2시간에 걸쳐 응급의학의 필요성을 일일이 대한의학회 임원들에게 설파했다.

당시 전공의 과정에 있었던 박규남 등 3~4명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한의학회 건물 밖에서 지켜보며 좋은 결과가 나오기만을 응원했다. 박규남 등은 응급의학과에서 수련을 받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전공의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응급의학과의 전문과목 인정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1993년에는 응급의학 전공의 수료자가 최초로 배출된 해이다. 그러나 아직 전문의 과목으로 인정이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수료자들은 전문의로 인정받지 못할까 불안한 마음이 계속됐다.

대한응급의학회는 전문의 과정의 신설이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다. 그러나 응급의학회의 열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대한의학회가 응급의학의 필요성을 느끼고 보건복지부에 정식적으로 건의해야만 전문과목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당시 다른 과들은 응급의학의 전문과목 인정에 대해 많이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응급의학 전문의 과정을 정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수련을 시작하는 대학도 있었다. 4년간 응급의학을 트레이닝 받은 사람들에게는 전문과목 인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박규남이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 홍윤식에게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됐습니까?”

다 잘 될 것 같네.”

홍윤식의 이 한마디 말에 박규남 등에게 추위는 가시고 없어진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자네들도 추운데 밖에서 고생 많았어!”

그날 회의에서 홍윤식 등은 대한의학회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낸 것이다.

이들은 같이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그 후 199514일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보건복지부령 제2)이 공포되었고, 다음 해인 199611일부터 종합병원의 응급의료센터에 반드시 전담 전문의를 배치하도록 법으로 정해졌다. 1995128일 전문의의 수련 및 자격인정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돼 드디어 응급의학이 전문과목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세브란스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한 뒤 고려대 의대 교수로 임용

 

응급의학이 전문과목으로 인정받기까지 대한응급의학회 초창기 임원들의 가슴은 타들어갔다. 홍윤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응급의학을 전문 의학 과목으로 만들기 위해 숱한 날을 고민했고, 마침내 그 뜻을 관철했다. 그동안 지냈던 어려웠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1976년 연세대 의학과를 졸업한 뒤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했다. 전공은 대장 항문 외과였다. 그러던 중 1985년 고려대학교 안산병원에 외과 교수로 들어갔다. 당시 안산에는 대학병원급은 고려대밖에 없어 외상 환자가 항상 줄을 이었다. 그는 외상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외상은 응급의료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어 응급실장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홍윤식은 응급실장을 하면서 응급의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응급환자가 오면 인턴과 레지던트가 함께 환자를 진료했지만, 체계적이지 못했다. 당시 병원 경영층은 응급실에 당연히 응급환자만 오는데 뭐하러 투자하냐? 그런 식이었다. 응급실장도 상주하지 않고 명목상으로만 있고, 인턴들이 모든 걸 도맡아 처리하는 시스템이었다.

홍윤식은 혼자서 열심히 한다고 응급환자를 모두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응급의료체계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는 응급의학에 대한 학문적 개념은 물론 응급의료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아 배울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다른 의료 선진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외상·응급의료 시스템을 배우다

 

1989년 홍윤식은 독일 외상 관련 시스템 연수 과정 프로그램 대상자로 선정돼 교환교수 자격으로 독일로 떠났다. 당시 국내에는 미국 외상 의료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었다. 독일로 간 홍윤식은 그곳 병원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봤다. 외상 외과 의사 한 명이 다발성 외상 환자를 혼자 다 치료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응급조치와 검사를 병행하면서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했다. 머리도 절개해 수술하고 배도 갈라 수술했다. 전쟁터에서나 있을 법한 전쟁의학처럼 환자를 혼자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이를 위해 독일에서는 외상 외과 레지던트가 8년간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의술을 익혀야 한다. 이 때문에 그 분야에서는 베테랑이라는 자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병원 내 다른 과 전문의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외상 외과 의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랐다. 복도에서 외상 외과 의사를 만나면 길을 비켜줄 정도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외상 외과 의사는 혼자 우선순위를 정해 급한 것부터 처리한다. 홍윤식도 독일 의사와 함께 수술은 물론 밤새도록 환자를 응급 처치하고 치료하는 것을 배워나갔다. 독일의 의료시스템은 홍윤식에게 충격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느끼지 못한 외상 외과의 독특한 시스템이었다.

 

독일과 다른 미국과 일본의 외상·응급의료 시스템

 

독일에서 6개월의 교환교수를 지낸 뒤 다음 해인 1990년 홍윤식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외상센터 연수를 이어갔다. 미국은 독일과는 다른 방식으로 외상센터를 운영했다. 중증 환자가 오면 여러 전문의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처리했다. 이 때문에 병원은 많은 의료인력을 유지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 있었다. 환자들이 부담하는 진료비도 엄청났다. 중환자실을 찾은 외상 환자가 하루 1~15,000달러를 지불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홍윤식은 미국의 외상 외과 시스템의 경우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는 것은 좋지만, 낭비가 심하다고 느꼈다. 우리나라에 적용하기에는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응급실에서 외상 환자만 보기에는 돈도 많이 들고 낭비가 심했다. 그렇다면 차선의 방식이 뭔가? 홍윤식은 고민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일본 오사카 대학 외상센터에도 잠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일본 병원도 하루 외상 환자 숫자가 2~3명 정도로 적었지만, 많은 의료진이 붙어있었다.

홍윤식은 독일과 미국, 일본 외상 및 응급의료 시스템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는 응급실을 기반으로 외상을 치료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6개월 동안의 독일 외상 외과의 경험, 16개월 동안의 미국의 교환교수 경험, 일본의 응급의료시스템을 보고 종합한 결과 우리나라는 응급실을 기반으로 한 외상 환자 치료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한민국에 적합한 응급의료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응급의학 전문의가 응급실에 상주하면서 외상 시스템을 접목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국식 응급의학을 본격적으로 구축할 이론적 배경을 의료 선진국에서 배우고 익히게 되었다.

 

대한민국에 맞는 응급의료시스템의 구축

 

우리나라 응급실은 어중간했다. 응급실은 환자들이 그냥 거쳐 가는 곳이었다. 인턴들이 주로 환자 치료를 맡았고, 정작 전문의는 있지도 않았다. 대한응급의학회는 응급실에는 응급전담 의사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복지부에 계속 제안하며 응급실의 여건 개선을 요구했다. 복지부도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응급실에 전문의가 상주하면 병원에 인센티브를 주는 식으로 화답했다. 이후 병원도 응급실로 오는 환자에 대해 배려하기 시작하면서 응급의학이 점점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홍윤식은 우리의 응급의료시스템은 기존 응급의학과와 외상 외과의 접목이 필요함을 느꼈다. 응급의학과가 중심이 되고 외상 외과는 이를 백업하는 시스템으로 구상하게 된 것이다.

응급의학과가 1차로 환자를 담당하고 외상이 백업해야 한다. 외상 환자에게 기존의 응급의학을 활용해 즉각적인 응급조치가 필요하다. 다른 과 전문의가 오기 전까지 응급실이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하는 것이 응급실의 역할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이를 위해 응급실이나 외상 외과도 슈퍼스타 한 명이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판단한다. 전체 의료시스템의 문제라고 본 것이다. 의료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했고, 앞으로 그런 쪽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슈퍼스타 한 명이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야!’

그는 슈퍼스타 혼자서 환자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팀워크가 중요하다고 봤다. 환자 치료가 제대로 안 될 때도 있고, 의사가 잘 모를 때 괜히 오기 부릴 것이 없이 항상 손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환자들은 용한 의사즉 슈퍼스타를 원하지만, 응급의학은 그것이 아니라 팀워크로 해결하고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다른 과들은 신생 과인 응급의학과에 대해 응급의학과가 무엇을 하는 과냐?”라며 업신여기는 일도 많았다. 정형외과에 환자가 왔는데 응급실에서 정확히 진단을 못 하면, “응급의학과는 뭐 하고 있었어?” 이런 비난을 쏟아냈다. 응급의학과는 신설 과이니까 다른 과 전문의보다 세부 전문 지식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이 때문에 홍윤식은 응급의학은 최종 진단과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속히 응급 처치를 하고 더 이상 병이 악화되지 않고, 전문 과에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최종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1차 응급조치를 취하는 과라는 인식을 다른 과에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응급실에 실습을 온 학생들에게도 그런 인식을 심어주었다. 기존 의료진들의 생각을 한꺼번에 바꾸기는 어려웠지만 실습하는 학생들에게 그런 인식을 주면 응급의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것으로 본 것이다.

더 나아가 응급의학을 전공하는 제자들에게는 응급의학과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는 자부심을 심어줬다. 응급의학과가 환자를 적재적소에 배정해 제대로 치료받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응급의사가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아니라 지휘자로서 역할을 하면 됐다. 그렇게 하니까 학생들도 응급의학에 대한 사명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응급실이 최종 진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 설정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응급환자가 왔을 때 환자의 상태가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너의 역할이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학제개편 때 응급의학 강의 살짝 집어넣어 고려대병원 응급의학과 개설

 

홍윤식은 고려대 의과대학에서 응급의학과를 만들었다. 사립병원에서는 임상과를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대학에서는 새로운 학과를 개설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없던 과를 만들려면 먼저 강의 교수가 필요했다. 때마침 고려대 의과대학에서 학제개편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외과, 내과 교수만 강의를 죽 했다. 그런 식으로 강의하면 중복 강의가 많아져 안되고, 통합 강의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여러 과 교수들을 모두 투입해 통합강의하는 시스템으로 바꿀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홍윤식은 이 기회를 이용해 응급의학과를 신설할 계획을 세우고 통합강의에 응급의학 강의 3학점짜리를 살짝 집어넣었다. 강의가 만들어지면서 교수가 필요하게 되었고, 응급의학과까지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당시 영남대병원과 전남대병원 등 지방에서도 응급의학과가 만들어졌다.

고려대 부속병원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응급실을 개선하기 위해 19943월 응급의학과를 만들고, 그해 이성우가 전공의 과정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고려대 의과대학 응급의학과가 진료뿐 아니라 교육, 연구를 병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응급의학과는 경증환자의 빠른 처치를 유도하는 한편 중증 환자에게는 즉각적이고 적절한 처치로 환자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었다.

이후 고려대 안암병원, 구로병원, 안산병원 응급실이 응급의료센터로 지정됐고 1998년 고려대 병원에 응급의학교실을 만들었다.

 

국제응급의학회 이사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응급의료 위상 드높여

 

홍윤식은 2004년 대한응급의학회 회장을 맡으면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응급의학회 정기총회에서 임기 2년의 국제응급의학회 이사로 선출됐다. 미국 응급의학회(American College of Emergency Physician) 명예회원으로도 위촉됐다. 국내 의료진 가운데는 처음으로 국제응급의학회 이사와 미국 응급의학회 명예회원이 된 것이다.

홍윤식이 국제응급의학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의 응급의료가 세계에 알려졌고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대한응급의학회는 학술, 구호 등 세계 응급의학의 주요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점점 위상을 확립해나갔다. 우리 응급의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외국에 나갔을 때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국제응급의학회는 당시 세계 모든 나라의 응급의학을 비슷한 수준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구체적으로 실행 단계에 접어드니 나라마다 사정이 달랐고 이를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결국 학문적 교류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응급의료시스템 전체를 동등한 수준으로 나란히 맞추기는 어려웠다. 독일은 독일대로, 유럽은 유럽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각자 가기로 했다.

 

환자를 큰 틀에서 보고 진료해야 제대로 치료할 수 있어

 

홍윤식에게는 환자를 보는 기본 신념이 있었다. 환자가 오면 ABC를 살피는 것인데, A는 기도(Airway), B는 호흡(Breathing), C는 혈액순환(Circulation)을 말한다. ABC를 제대로 점검하면 어떤 환자도 어렵지 않게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환자가 오면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찾고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할 것을 주문한다. 전체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정해 치료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먼저 환자가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호흡은 정상인지, 이후 혈액순환은 원활한지 등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전체적인 문제점을 찾는다고 여러 검사를 하면서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치료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걸 우려했다.

홍윤식은 의사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의료시스템이라고 강조한다. 조금 미세한 부분은 틀려도 상관없지만, 중요한 것은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면서 환자를 진료하라고 제자들에게 항상 주문한다.

홍윤식의 응급의학에 대한 사랑과 연구는 그를 2010년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의학한림원(National Academy of Medicine of Korea)의 정회원으로 만들었다. 오로지 응급의학 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응급의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의학한림원의 정회원으로 뽑히려면 학회에 대한 기여는 물론 연구업적도 뛰어나야 하며 의학 및 관련 전문분야의 최고 석학으로 인정받아야 가능하다.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회원으로서 홍윤식은 의학연구 및 교육에 관련한 정책 수립, 국가 의료정책에 대한 건의, 평가 및 자문, 의학의 장기 연구기획, 의학 관련 학술상, 국제교류 등의 학술 활동을 지원하며 국민의 건강증진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다.

 

후배들을 위해 응급의료분쟁 지침 만들 것

 

홍윤식은 현재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상임감정위원으로 활동하며 응급의료분쟁 지침을 만들고 있다. 응급의학 관련 의료분쟁이 발생했을 때, 분쟁 해소를 위한 관련 지침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후배들이 응급의료 현장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저는 한국형 응급의료분쟁 지침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모두가 안 해 본 일이지만, 노력하면 응급의료분쟁 해소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응급의학을 공부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처음에 외과에서 응급의학과로 옮겼을 때 응급실에서 인턴, 레지던트랑 있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회의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응급의학을 계속 공부하면서 다른 과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는 제자들이 있어 좋았고, 지금은 후회는 없습니다. 그 당시 응급의료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저를 응급의학과에 계속 머무를 수 있게 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는 제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애비 없는 자식을 만들 수 없었죠.”

 

의료 명문가(名門家)

 

홍윤식의 아버지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원을 나온 내과 의사 출신이며, 그의 동생도 의사다. 홍윤식의 큰아버지는 대구 의학전문학원(지금의 경북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6.25 전쟁 이후 고향인 평안북도 신의주로 간 뒤 평양 의학전문학원 교수를 지냈다. 그의 고모할머니는 1890년대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치과 의사였다.

 

홍윤식 교수 프로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세브란스병원 외과 전공의

고려대학교 의학 박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응급의학교실 교수

대한응급의학회 고시이사, 학술이사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국제응급의학회 이사

미국 응급의학회 명예이사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정회원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상임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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