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의료 관련 법률 제정과 응급의료기금 확대로 응급의학이 크게 도약할 수 있었다”

◆ 1등 할 자신 없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

1991년 인천 길병원 설립자인 이길여 이사장과 김홍일 병원장이 갑자기 응급실로 라운딩(회진)을 왔다. 응급실에 환자가 많아 한창 바쁠 때였다. 길병원은 경기, 인천 지역에서 응급환자가 가장 많이 몰려들었고, 응급실이 항상 혼잡했다. 환자들로 가득 찬 응급실의 응급환자를 어떻게 진료하는지 이길여와 김홍일이 보러 온 것이다.

그 자리에서 이근 길병원 응급실장은 이길여에게 건의했다.

“이사장님! 우리 병원에 응급환자들이 이렇게 많이 와 마치 도떼기시장 같습니다. 그래서 응급의료를 전문화해야 합니다. 원주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서는 전문의 2명이 직접 진료합니다. 우리도 그 병원을 벤치마킹해 응급실을 제대로 운영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주 세브란스병원은 내과와 외과 전문의가 응급실을 전담하고 있었다. 임경수 외과 전문의와 황성오 내과 전문의가 근무하면서 인턴들을 지휘하고 환자들을 돌보는 시스템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응급실은 적자가 이어져 병원 경영진의 관심 밖이어서 형식적으로 응급실장만 임명해 놓고 인턴 위주로 진료하곤 했었다. 환자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경영상 손해였다. 이 때문에 병원 경영진은 응급실에 섣불리 투자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길여는 응급실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다.

이길여는 이근에게 물었다.

“그래? 응급실을 활성화해 대한민국에서 1등 할 자신 있어?”

“네! 자신 있습니다.”

“내가 미국에 가서 보니까 응급의학이 인기가 많더라. 미국은 응급진료를 잘하던데. 1등 할 자신 없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

이길여는 미국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수련해 미국의 의료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사장님! 그러면 제가 미국에 잠깐 연수를 다녀와 응급의학을 제대로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길병원의 응급의학이 시작됐다. 응급의학과가 없었을 때였고, 전문의 수련제도가 시작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이근은 곧바로 미국 듀크(Duke) 대학병원으로 3개월간의 연수를 떠났다. 오너의 특별지시를 받고 응급의학을 체계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듀크대에는 물리학자로 있는 매형과 누나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 사정도 사전에 어느 정도 알 수 있어 이근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근은 미국으로 떠나면서 길병원 응급실을 외과 계통 전문의 위주로 구성해 활성화 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연수 이후 그는 1992년 3월 길병원에 응급의학과를 개설해 응급의학과 전공의 수련을 시작했고, 1996년부터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육성하면서 길병원 응급의학과를 전국 최고의 수준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한다.

◆ 환자 상대로 한 사보타주는 큰 죄

1985년 길병원 응급실장을 맡은 이근은 인턴들과 함께 근무하면서 항상 응급실에 불만이 많았다. 응급실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전공의들은 회진하면서 환자 보고를 할 때 간단히 보고만 하고 마는 식이었다. 사망한 환자를 제때 보고하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어느 날 이근은 다음 날 아침 간밤에 숨진 환자에 대해 보고하지 않은 전공의에게 쏘아붙였다.

“왜 그 시간에 노티(환자 상태 보고) 안 했어?”

“환자가 돌아가실 것 같아서 못했습니다.”

“뭐라고?”

이근은 일부 전공의들이 환자에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환자 상태가 좋지 않으면 쉽게 진료를 포기하는 일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응급상황일 때 수술에 들어가야 하지만, 수술실이 잡히지 않으면 환자에게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어 전공의들은 별다른 조치 없이 그대로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환자가 쇼크로 죽을 수 있는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 일부 전공의는 심지어 환자가 쇼크 때까지 기다리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공의들은 힘들고 살 가능성도 없는 환자의 가족들에게는 가망 없다는 식으로 쉽게 선고해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예전에는 응급실에서 환자를 살릴 수도 있었지만, 일부 의사들이 적극적으로 진료하지 않아 사망한 일도 있었던 셈이다.

이근은 전공의들이 병명과 치료방법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환자를 상대로 ‘사보타주’를 하는 것은 큰 죄로 생각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의료기기로 환자의 상태를 일일이 파악할 수 있어 의사들의 사보타주는 상상할 수 없지만, 의료 현실이 열악한 당시에는 그러한 일들이 가끔 벌어졌다. 의사가 직접 청진기나 손으로 진단하다 보니, 제대로 된 진단도 어려웠으며 환자 치료가 힘들 것 같으면 의료진이 쉽게 포기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를 보고 이근은 생각했다.

‘의사가 최선을 다해 치료하기를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된다.’

의사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소신이었다.

이근은 결심했다.

‘내가 외과 의사로서 돈도 많이 벌고 수술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어가는 환자를 최선을 다해 진료하지 않으면 의사로서의 사명은 아니다.’

그는 유방암 수술 전문의로서 꽤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당시 외과 의사들은 월급보다 촌지가 두 배 이상일 정도로 인기가 많았을 때였다. 그러나 5년간 응급실장을 맡으면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 환자를 수없이 봐왔다. 환자가 적어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억울하게 죽어가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그래서 응급의학을 결심하게 됐다. 외과 의사를 포기하고 응급의학으로 전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응급의학이라는 과목은 생소했다. 몇 군데 응급의학과가 개설했지만, 초창기라서 제대로 된 학문으로 구축되기 이전이었다.

◆ 7개 전문의로 구성된 응급의학센터 개설

길병원에 응급의학이라는 새로운 학과를 개설한 이근은 신경외과 전문의 박철완 교수를 응급의학과로 합류시켰다. 길병원을 외과 계통 전문 응급실로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병원은 응급의료센터라고 이름을 만들었지만, 길병원 응급실은 응급의학센터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응급의학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오너 이길여의 응급의료에 대한 마인드도 이근에게는 큰 힘이 됐다. 이길여의 지원에 힘입어 길병원은 막강 응급실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이길여는 다른 과 교수들에게 이야기했다.

“이근이가 자궁 외 임신환자를 내과로 입원시켜도 두말하지 마세요! 이근이가 말하는 것은 무조건 들어주세요!”

설립자가 응급의학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다른 병원과 다르게 ‘입원권’의 권한을 응급의학과가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병원은 해당 진료 환자를 담당하는 임상과에서 입원을 결정했지만, 길병원에서는 응급실에서 병실의 입원 여부를 결정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약간 강제적이었지만, 응급의학과 전공의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설립자의 배려였다. 이 때문에 응급의학과의 위상이 강화되었다.

이는 응급의학과를 제외한 다른 과 일부 교수들에게는 불만 사항이었다. 일부는 사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응급의학과에 부딪혔을 때 언제든지 병원을 관둘 자세로 나왔다. 서로 일촉즉발의 충돌 직전이었다. 그러나 이근은 각 임상과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면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이근은 응급실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의료사고에 대해 특히 민감했다. 학회가 있어 해외에 나가야 할 때 그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자들이 있었지만, 아직 많은 것을 몰라 전체를 맡기고 홀가분히 있을 수는 없었다. 외국 출장 중에도 매일 전화해 응급실을 체크할 정도였다.

이후 이근은 응급실의 질적인 도약을 추구한다.

1999년 길병원은 전국 최초로 환자의 전문적 진료를 위한 응급의료센터를 개소한다. 응급실이 응급의료 전문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신경과, 마취과, 방사선과, 소아과 등 7개 과의 전문의를 응급실 소속으로 배치해 응급환자를 진료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하는 방식이었다. 이로 인해 응급실을 통한 입원 환자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위상이 강화됐다. 미국의 레벨1 외상센터와 같은 수준이었다.

평소 80~100명이었던 응급실 방문 환자는 전문화 이후 150명으로 늘었다. 두 배 가까이 환자 수가 늘었지만, 응급실은 혼란스럽지 않았다. 응급환자가 오면 곧바로 입원을 시키는 구조를 만들었고, 입원실이 부족할 때면 새로 조성한 응급병실에 입원시켰기 때문이다. 응급센터 내에 응급 전용 병실, 응급 중환자실을 설치해 응급환자의 연계치료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길병원 응급의학 전공의의 실력은 월등히 높아졌고 응급의학과가 항상 인기를 끌었다.

다른 병원이 길병원의 응급실을 모델로 삼는 일도 많았다. 복지부도 길병원의 응급의학센터를 본떠 응급의료 전담 병상을 따로 만들었다.

◆ 응급의학의 비약적 도약은 법 제정과 기금 마련 덕분

응급의학이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응급의료와 관련된 법률이 만들어지고 응급의료기금이 마련되면서부터였다. 이근은 법률 제정과 기금을 마련할 당시 실무자로 직접 참여했다.

1993년 정부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의 모법(母法)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실무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서울대 의대 이종구 교수, 보건사회부 박윤형 과장, 법제처 홍두표 국장, 시민단체 건강세상네트워크, 전문가 그룹 이평수, 그리고 대한응급의학회 법제이사였던 이근이 참여해 국립의료원에서 주로 회의를 하며 응급의료 모법을 만들어나갔다. 모법이 만들어진 뒤 이듬해에는 서울 수유리 4·19 묘역 근처 한 모델에서 이들이 합숙하며 시행령, 시행규칙을 만드는 과정에도 동참했다. 응급의료 관련 법 마련은 응급의학을 발전시킨 역사적 계기였다.

이와 더불어 응급의료기금도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1994년 응급의료 관련 법이 만들어지면서 응급의료기금의 중요성이 제기되었지만, 당시 사용할 수 있는 기금은 20억~30억 수준이었다. 요양기관 과징금의 50%를 투입한 금액이었다.

기금 마련을 위해 국회에서는 보건복지부 김태홍 의원의 보좌관이었던 허윤정이 주도적으로 나섰다. 복지부에서는 최희주 지역의료 과장이 정책 입안을 준비했었고, 학회에서는 이근이 총괄하면서 유인술 충남대 교수와 정구영 이대목동병원 교수 등 12명을 선발대로 뽑아 각 국회의원 방을 찾아다니며 응급의료기금을 만들기에 주력했다. 이근은 당시 학회 정책이사였다.

20억~30억 원에 불과했던 응급의료기금이 도로교통범칙금 20%를 응급기금으로 전환하면서 응급의료는 법의 마련에 이어 기금까지 확보할 수 있게 돼 날개를 달게 되었다.

2002년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 일부 개정되면서 응급의료기금을 400억 원으로 대폭 늘리는 법안이 통과됐다. 김태홍 의원이 발의하고 함승희 의원이 동조했으며, 당시 보건복지위 위원장이었던 조순형의 협조로 통과가 된 것이다.

이후 2010년에는 도로교통 과태료의 20%가 추가 출연돼 매년 2,000억 원 규모로 기금이 크게 늘었다.

대한민국은 법률 제정과 응급의료기금 확보로 의료 선진국인 미국와 유럽의 응급의료시스템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오늘날 코로나19 모범 방역 국가로 우뚝 선 것처럼, 법률과 기금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응급의료는 서방 의료 선진국을 따라갈 정도로 시스템을 정착할 수 있었다. 미국의 병원은 자본주의 형태로 운영하다 보니 진료비가 비싸면서도 병원 시스템은 잘 되어 있었다. 반면 유럽은 사회주의 시스템으로 운영해 이송체계는 잘 돼 있었지만, 병원 의료진 시스템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항상 불안한 상태였다.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장점만을 받아들이는 모델을 만들려고 했다.

◆ 닥터헬기와 외상센터의 밑그림

국립의료원 내에 중앙응급의료센터는 2002년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센터에는 전남대 의과대학에서 전문의를 딴 윤한덕이 팀장으로 있으면서 실질적으로 센터를 이끌고 있었다. 윤한덕은 이근에게 우리나라 외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외상센터 설립계획을 설명했다. 외상과 응급의학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교통사고가 크게 늘어나면서 응급환자 중 외상으로 온 환자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윤한덕은 외상센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자료를 만들 필요가 있었고, 그 작업을 이근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는 이근에게 “국립의료원에 외상의 문제점과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용역비가 690만 원 정도밖에 없다”며 “부족하지만 이 비용으로 바람직한 외상센터 모델 연구용역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후 이근은 그 분야 적합자로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병원 김승호 교수와 외상학회 아주대 이국종 교수를 윤한덕에게 소개한 뒤, 이들이 정부에서 바라는 외상센터의 밑그림을 그려줄 것을 당부했다.

이근은 외과 의사로서 외상환자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병원에서, 적절한 치료가 중요하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1991년 미국 듀크대에 연수 갔을 때 ‘날으는 응급실’인 닥터헬기를 처음 봤다. 당시 환자가 위독해 쇼크 상태에 빠졌다는 전화가 오자 외과 의사가 직접 헬기를 타고 바로 출동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닥터헬기도 그렇지만 어떻게 의사가 함께 헬기를 타고 환자를 향해 날아갈 수 있을까? 한참 후 의사는 환자를 헬기로 병원에 데려온 뒤 헝겊으로 된 포대를 풀었다. 포대 안에는 헬기 안에서 처방한 약 등의 목록이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적혀 있었다. 프로토콜(진료 기록)대로 헬기 안에서도 처치하면서 왔던 것이다.

‘야! 이거 정말 대단하다. 의사가 모니터링을 직접 하고 이송할 병원의 준비상황까지도 모두 다 알고 있어.’

이근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놀라운 일이었다.

헬기가 도착하자 병원 측에서 의사 몇 명이 달려와 기존에 목에 차고 있던 콜라브레이스(보조대)를 새롭게 바꾸었다. 한쪽에서는 피를 뽑아서 검사하고 엑스레이 사진도 찍었다. 그 뒤로 환자 CT 사진을 찍었다. 마취과 의사는 마취하고, 옆에서 기록하는 의사도 보였다.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의료 선진국 미국을 새롭게 봤다.

이근은 그 당시를 잊지 못한다.

“듀크대학에서 플라이트 서전(Flight Surgeon, 항공기에 탑승한 의사)이 하늘색 옷을 입고 헬기에 직접 탑승해 상황실까지 환자의 상태를 전송하는 것을 봤습니다. 이후 복지부에 적극적으로 닥터헬기의 필요성을 알렸죠. 골든타임(golden time)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알게 된 계기였습니다. 골든타임은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사고 대응과 인명 구조의 성패를 좌우하는 초기 대응 시간을 일컫는 말로, 생사가 달린 금쪽같은 시간을 뜻합니다. 외상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질환이나 뇌질환도 모두 해당되죠. 뭐든 시간이 제일 중요하다는 개념을 파악한 것입니다.”

이후 이근은 수년 동안 보건복지부 등에 닥터헬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다. 보건복지부도 심장·뇌·외상 등 중증 응급환자를 위한 전용 헬기 도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함께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기 3년 전인 1998년, 이근은 일본 간사이 국제공항을 갔다. 간사이 공항은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바다를 매립한 인천국제공항처럼 바닥 위에다 깔아놓고 지은 공항이다. 인천국제공항이 인천에 들어선다는 것을 듣고 간사이 공항을 방문해 거기에서 구명구급센터(일본의 최상위 응급의료기관)를 본 것이다. 공항 인근에 있는 병원으로서, 응급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는 일본의 사례를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닥터헬기인 ‘닥터헬리’를 보면서 골든타임의 중요성도 알았다.

이근은 영국 로얄 왕립병원과 독일 튀빙겐(Tubingen) 대학을 방문해서도 외상센터의 중요성을 알았고, 의사가 다친 사람을 헬기로 살린 것을 직접 눈의로 목격했다. 닥터헬기라는 개념이 서서히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외상환자의 사망률이 높아 이를 줄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2002년 우리나라의 예방 가능 사망률은 50%에 육박했다. 이는 살릴 수 있는 환자 2명 중 한 명은 의료진으로부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다는 의미였다. 지금은 2017년 말 기준 예방 가능 사망률이 19.9%로 떨어졌지만, 당시에는 제때 치료받지 못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외상은 국가가 전담해 지원해야만 한다고 이근은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이 사고로 죽었을 때 비용, 어릴 때 외상으로 죽었을 때 비용이 엄청날 것으로 추정했다. 외상은 24시간 아무 때나 가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누구나 사고를 당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세금으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외상으로 젊은 사람이 죽는 것은 아까웠다. 생명의 가치는 국가가 보존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했다.

◆ 대한응급의료지도의사협의회 구성

이근은 병원 전 단계가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 학생들에게도 병원 전 단계가 환자 치료의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강의하곤 했다. 우리나라 병원 전 응급의료의 현실에서 응급구조사의 역량과 처치 기준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고, 직간접적으로 응급상황을 통제하고 자문할 수 있는 응급의료 지도의사의 존재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위한 기구로 대한응급의료지도의사협의회의 필요성을 느꼈고, 협의회는 2007년 생겨났다. 초대회장은 이근이었다.

지도의사협의회는 현장과 이송 중에 시행되는 의료행위뿐만 아니라 구급대원의 교육, 훈련 및 평가 등 지역의 응급의료체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만든 대한응급의학회 산하 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큰 조직이다.

EMS(emergency medical service) 포럼에서부터 시작한 지도의사협회의가 응급의학 전문의 400여 명을 비롯해 준회원인 응급구조사, 소방공무원까지 참여하는 협의체 성격의 모임으로 확대된 것이다.

지도의사협의회는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연구, 학술 활동과 응급의료종사자에 대한 교육, 의료지도, 평가 등을 한다. 해마다 대한응급의학회 주관으로 봄과 가을에 행사를 개최하면 준회원인 응급구조사와 소방공무원 등 300~400명을 포함해 1,000여 명이 참여할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다.

◆ 응급의료 서브 스페셜(sub-special)이 중요해질 것

이근은 응급의학과가 생겨날 초창기부터 응급의학이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응급의학의 인기가 더 올라가고 응급의학이 서브 스페셜(세부전공)로 분화해 앞으로 의료는 응급과 비응급의 싸움이 될 것으로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이근은 길병원 응급의학센터에 서 다양하게 실험을 했다. 방사선과를 응급실로 끌어들여 응급방사선과를 만들었다. 소아과도 응급의학과와 소아과의 전문성을 합한 소아응급과를 만들어 환자들에게 전문성이 있는 응급의료로 다가서려고 노력했다.

그는 성형외과나 가정의학과, 피부과 등과 같이 임상 과끼리의 경쟁은 없어질 것이고, 특히 응급에도 소아나 노인으로 양분화돼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외과나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미용, 비만을 하는 것처럼 과의 구분은 없어지고 얼마나 세부화된 전공을 특화하느냐가 미래 의료를 형성할 것으로 생각한다.

대표적인 것이 소아응급과와 노인응급과이다. 아이들과 성인들은 장기의 기능부터 다르다. 성인들은 혈관이 경화되고 근육이 위축되어 있지만, 어린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진료 대상에 따라 응급의학과도 소아응급과와 노인응급과로 크게 양분될 것으로 전망한다. 소아와 노인을 치료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으면, 의료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병원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세부 전공으로 분화되지 않으면 의료도 어려움이 닥칠 것으로 보고 있다. 응급의학 초기에는 응급의료가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응급이 선진국형으로 바뀔 것으로 전망한다. 전문심장소생술, 전문외상, 소아소생술 등과 같은 응급과 전문영역이 결합됐을 때 제대로 된 응급의료가 정착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길병원은 현재 응급의학과 관련한 클리닉이 전문심장처치, 전문외상처치, 전문소화처치, 환경응급의학, 노인의학 등 10여 개가 넘는다.

▶ 이근 교수 프로필

<학력>

1970. 서울 용산고등학교 졸업

1977. 경희대학교 의대 졸업

1988.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원 졸업(석사)

1992.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원 졸업(박사)

<경력>

1985. 인천 길병원 외과 과장

1988. 철원 길병원 병원장

1992. 가천의대 길병원 응급의학과 주임과장

1994. 대한응급의학회 이사

2000. ACEP(미국응급의학회) 정회원

2003.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

2007. 대한응급의료지도의사협의회 초대회장

2013. 인천 길병원 병원장

2020. 가천의대 길병원 교수

◆ 인천 길병원 응급의료센터

길병원 응급의료센터는 응급환자의 전문적 진료를 위한 체계적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진료 과정의 의사결정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고, 특히 중증외상환자들은 환자 분류소에서 중증외상센터로 바로 이동해 단시간 내에 최종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경증환자의 경우 신속한 진료를 위한 Fast Track이 운영되고 있어 관찰 구역에서 빠른 진료와 처치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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